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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특별기고

"네로 이야기, 그리고 사도바울"

로마 서쪽 성문 밖 5㎞쯤 떨어진 사도바울 순교 기념 교회 오른쪽 벽면에 대리석에 새겨진 바울의 순교 장면이다. (사진_청계교회 주기석 목사)

  네로는 17세에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엄마 아그리피나 덕분이었지만, 그녀의 인생은 정말 파란만장했다. 그녀는 당시 유력한 장군과 결혼하여 22세에 네로를 출산했지만, 남편은 일찍 죽었다. 이후 아그리피나는 로마의 3번째 황제인 친오빠 칼라굴라 황제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유배가 되지만, 삼촌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의 4번째 황제가 되면서 극적으로 사면되었다. 그녀는 49년에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결혼에 성공했다. 그녀는 네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남편 클리우디우스까지 독살한 비정한 여인이었다. 


  드디어 네로는 54년에 5대 황제로 등극했다. 집권 초기 네로는 매우 관대하고 합리적인 통치자라는 평을 받았다. 네로는 민생을 위해 해적을 토벌하고, 부패를 척결하고, 백성의 세금도 감면했다. 또한, 물가안정에 힘쓰고, 목욕탕 무료 이용 및 무료 문화 공연을 확대하는 정책으로 로마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네로가 이러한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치맛바람 덕분으로 보인다. 네로 엄마는 당대 뛰어난 철학자 세네카를 네로의 과외 선생으로 붙였다. 이 과외 학습효과는 약 5년간, 즉 59년까지는 유효했다.  


  59년은 바울이 세 번의 전도 여행을 마치고, 가이샤라에서 로마로 호송된 시기였다. 바울은 로마에서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지냈지만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로워 그때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을 청하여(행28:17) 자신이 로마에 호송된 이유를 설명하기 했고, 또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거침없이 가르쳤다.(행 28:31) 이때까지 특별한 기독교 박해는 없었다.

  기독교 박해의 시작점을 로마 대화재가 발생한 64년으로 보는데, 이전에 네로에게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17세 젊은 황제 네로는 예술을 사랑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네로는 황제가 되어 성숙해 가는데도, 엄마의 간섭과 잔소리는 끊이지 않고 점점 커졌다. 네로는 결혼 문제로 엄마와 갈등을 빚으면서 결국 암살자를 보내 엄마를 살해(59년)하고, 시대의 패륜아가 된다. 이전에도 네로는 황제의 걸림돌이었던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했으며(55년), 65년에는 임신한 아내, 포파이아를 순간의 분노로 죽여 버렸다. 역사가는 네로황제 정신질환의 변곡점을 59년 친모를 죽인 시점으로 본다.
  이 대목에서 네로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로마는 매년 황제의 초상화를 넣은 주화를 발행한다. 네로의 집권 초기와 중기의 초상을 비교해 보면, 뒷목 두께가 50%가량 두꺼운데, 이러한 증상은 쿠싱병이 유력하다. 이 병에 걸리면 체중이 느는데, 주로 얼굴과 뒷목에 집중된다고 한다. 쿠싱병은 우울증, 분노조절장애 및 인지기능 장애를 동반하고, 심해지면 조울증으로 발전한다. 이는 네로를 정신질환자로 추측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네로는 62년 스승인 세네카가 은퇴하자, 폭군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여흥과 사치에 엄청난 재정을 낭비했다. 이러한 네로의 일탈은 로마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64년 덥고 건조한 7월 18일, 네로는 로마에서 60km 떨어진 안티움에 있을 때  로마 시내 빈민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당시 강한 남동풍이 불어, 목조 가옥과 올리브기름 창고를 태우고 불길이 커지면서 약 6일 동안 로마시를 불태웠다. 네로는 화재 현장 수습을 위해 노력했지만, 네로가 왕궁을 건설하려고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괴소문이 퍼졌다. 
  어머니를 죽인 자가 도시에 불을 지르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민중에 퍼졌다. 궁지에 몰린 네로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비난의 화살을 피하고자 희생양을 찾았는데, 그것이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산채로 화형당하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들의 밥이 되었다. 이 시기 사도바울도 67년에 참수형을 당했다. 기독교는 이러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점점 더 견고해졌다. 
  한편 64년 로마 대화재로 불탄 지역에, 네로는 자신을 위한 황금궁전 짓기를 계속했다. 이로 인해 국고가 바닥나자, 네로는 신전을 약탈하여 비용을 충당하고, 세금을 올리는 등  반시민적인 정책을 펼쳤고 이에 시민들은 네로에 대해서 완전히 돌아서 버렸다. 또한 네로 말기에는 국고가 바닥나서 군인들의 급료도 밀려, 군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민심 이반의 원인이 되었다. 이에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공적으로 선포하였고, 네로는 노예의 집에 달아나 숨었다가, 칼로 자결하여 생을 마감했다(68년 6월 9일).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19:21)라 했는데, 로마는 바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바울은 대도시 중심의 선교전략을 펼쳤는데, 로마는 가장 큰 도시이고 인구도 백만이 넘어 바울에게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로마는 헬라 문화와 사상이 스며든 도시였고, 로마의 도로망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확장성이 클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BC 200년경 히브리어로 된 모세 오경이 헬라어로 번역되고 확산이 되었는데, 로마 인구의 절반이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복음 전파의 전진기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사도바울은 ‘박해라는 터널’의 초입의 순교자였다. 그 뒤를 이어 많은 평신도 순교자가 있었다. 그들의 피로 터널을 뚫어, 313년에 결국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다. 
 
  선교는 순교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초성을 따서 우선순위라고 외치고 싶다. 
 

  리가 교하고 교해야  기가 기회가 된다.

서동호 장로(울산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