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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특별기고

사도바울 “로마의 길이 전도의 길이 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는데, 로마가 닦은 도로를 사도바울이 활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호기심에 살펴보니, 사도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는『세바스테(터키지역) 도로』를 이용했고, 2차/3차 전도여행 때는 『에그나티아(그리스지역) 도로』를 이용했다. 
  세바스테 도로는 터키의 서쪽 에베소에서 시작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라→더베→다소까지 약 1,000키로의 도로이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안디옥(수리아)을 출발하여, 구브로섬을 거쳐, 버가(밤빌리아지역 수도)라는 항구도시에 도착했다. 이 당시 바울은 풍토병에 걸려, 버가에서의 선교를 미루고, 풍토병에 치료에 유리한 고산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갈라디아지역 수도)으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질병)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갈4:13)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을 가려면, 험한 타우루스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약 200km나 되는 거리였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의 중점 지역은 갈라디아지역의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으로 보인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재위 BC27-AD14)는 BC 25년 터키를 병합했고, BC 6년에 세바스테 도로를 완공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을 터키와 시리아를 통치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 전파에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골수 유대인들의 배척으로 이고니온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고니온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약 180km 거리이다. 두 지역 사이는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평야가 펼쳐지는데, 현재도 이곳에서 나오는 밀이 터키의 전 국민이 먹고도 남는다고 한다. 당시에도 이고니온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도시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고니온에도 많이 살았고,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다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행14:1)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치려 했고, 급히 바울과 바나바는 약 30km 떨어진 루스드라로 피했다. 
  루스드라는 작은 도시로 유대인이 많이 살지 않아 회당이 없었고, 바울은 길거리 선교에 나섰다. 바울이 앉은뱅이를 일으키자 무리는 바울과 바나바를 신처럼 모시려 했고, 바울은 우리도 너희와 같은 사람이라며 무리를 진정시켰다. 한편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골수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기 위한 추격대를 보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행14:6) 
  바울은 돌에 맞아 의식을 잃어가면서, 스데반이 떠 올랐을 것이다. 스데반의 순교의 자리를 지켜 본 바울처럼, 돌에 맞은 바울을 청년 디모데가 지켜보고 있었다. 훗날 디모데는 2차 전도여행 때 바울과 동행하게 된다. 한편 바울은 기적같이 살아났고,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났다.(루스드라→더베: 약 100km)
  더베로 가는 여정은 다행히 산지가 아닌 평야 길이었다. 더베에서 바울의 선교사역은 “그 성(더베)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행14:21)고 기록한 내용이 전부이다. 바울은 더베를 반환점으로, 다시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버가로 되돌아가면서 개척한 교회와 성도를 돌봤다. 버가에 도착한 바울은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출발지 안디옥으로 돌아와 1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했다.
  지금부터는 2차 전도여행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바울은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450km나 되는 긴 해안도로를 걸어서 고향 다소에 도착했다. 잠시 다소에 대해 살펴보면, 다소는 길리기아지역의 수도로, 인구 50만의 큰 도시였다. 부유한 항구도시였으나, 아테네처럼 학문이 번성하여 대학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흑염소가 많아 흑염소 가죽으로 텐트를 만드는 업이 번성했으며, 바울의 부모는 로마에 군용텐트를 공급한 기여로 로마시민권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바울은 텐트메이커가 되었다. 
  바울은 고향 다소를 떠나, 1차 전도여행 코스인 다소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의 경로로 이동하면서, 개척한 교회와 성도를 돌봤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에베소(아시아지역 수도)로 가려고 했으나 성령께서 막으시어, 약 1,000km를 걸어 드로아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네압볼리(마게도냐지역)로 건너가 15km를 걸어 에베소에 도착했다. 
  여기서 에그나티아 도로를 상기시켜 보자. 에그나티아 도로는 비잔티움(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비잔티움 →네압볼리 →빌립보 →데살로니가 →펠라 →에데사 →디라키움(종착지)에 이르는 약 1,100km의 도로였다. 바울은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군사요충지, 퇴역군인 거주)와 데살로니가(마게도냐지역 수도, 항구도시)를 중점적으로 전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빌립보는 광산이 개발되고, 로마의 퇴역군인들이 상주하는 큰 도시였으나, 유대에서 거리가 멀어서인지 유대인이 많지 않아 회당이 없었고, 여기서도 길거리 전도를 나섰다. 
  바울은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났고, 그녀와 가족은 유럽 최초의 기독교인이 되었고, 루디아는 자기 집을 예배처로 제공했다. 또 바울은 귀신 들린 여인을 쫓아냈는데, 그 여인의 점괘로 돈을 벌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관원들에게 백성 선동죄로 고발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혔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가족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튿날 관원들은 바울에게 빌립보를 떠나달라 했고, 바울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의 낭만적인 해변 길을 거쳐 항구도시 데살로니가에 도착했다.(빌립보→암비볼리→아볼로니아→데살로니가: 약 160km).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친척 야손의 집에 머물며 3주 동안 유대인 회당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는데, 경건한 헬라인과 적지 않은 귀부인이 믿는 성과가 있었다(행17:4). 이에 시기한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찾기 위해 야손의 집에 쳐들어갔으나 찾지 못했다. 위협을 느낀 바울은 그 밤에 데살로니가가 떠나 베뢰아로 도망갔다(데살로니가→베뢰아: 약 75km). 
  베뢰아에서 바울과 실라는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했고, 많은 헬라인이 믿었다. 데살로니가의 골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몰려와 바울을 위협하였고, 바울은 혼자서 배를 타고 베뢰아에서 아덴(아테네)으로 갔다. 바울은 아덴에서 많은 우상을 보고,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 철학자들과 논쟁하며 복음을 전파했으나, 성과가 많지 않았고, 고린도도 이동했다(아덴→고린도: 약 80km).
  고린도(아가야지역 수도)에서도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서 가르쳤으며, 이곳에서 텐트업자 아굴라를 만났다. 또한 고린도로 내려온 실라(빌립보)와 디모데(데살로니가)가 합류하였고,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음 전파에 매진했다. 고린도에서 2명의 회당장(그리스보와 소스데네)이 개종하는 등 큰 성과가 있었다. 한편 바울은 가이오총독(재위 AD51-52, 아가야지역)에게 골수 유대인에 의해 고발당했는데, 무죄로 풀려났다.
  고린도에서 18개월 사역을 마친 바울은 항구도시 겐그레아로 가서, 배를 타고 에베소에 잠시 들렸다가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시리아 안디옥에 귀환하여 2차 여행을 마쳤다.
  2차 전도여행으로 바울은 빌립보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와 고린도교회를 세웠다. 또한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의 서신을 보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AD53-57)도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에베소에 도착해 약 3년을 머물렀는데, 회당에서 3개월을 가르치고, 두란노서원에서 2년 동안 가르치며, 고린도전서의 서신을 보냈다. 또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지역에서 전도하면서 고린도후서를 보냈고, 그후 고린도로 내려와 3개월 체류하면서는 로마서를 써서 보냈다. 
  끝으로 바울은 가까운 갈라디아지역(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을 1차로, 그리스지역(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을 2차로, 에베소를 3차로, 로마를 4차로, 스페인을 5차로 땅끝까지 가는 전도 전략이었다. 또한 로마의 군사 도로를 활용하고, 확장성이 큰 대도시를 공략하고, 회당을 통한 효율적인 전도 전략이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이끄심과 바울의 순교적 사명이 하나 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전도가 정체된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도행전을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의 소명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