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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특별기고

"헤롯대왕과 아버지"

 

  성경을 읽다 보면 헤롯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도대체 헤롯은 불멸하는 사람인가? 어떻게 저렇게 오랫동안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헤롯이라고 지칭한 사람들이 모두 동일 인물이 아니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차근히 살펴본 결과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유아 대학살을 명령했던 헤롯대제는 처세술과 뛰어난 정략적 사고로 인하여 정권의 실세로 오른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것인가?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를 위한 구원 여정 속에서 발생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오실 메시야를 예표 했던 모세의 때에
바로에 의해 발생했던 유아대학살과
헤롯대제에 의해서 자행되었던 유아대학살이 오버랩되면서
헤롯가문에 대한 학습이 시작되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 하스몬 왕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하스몬 왕조의 힐카누스2세는 BC 67년에 즉위했는데, 일 년 만에 BC 66년에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2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제사장직만 유지했다. 절치부심한 힐카누스 2세는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BC 63년에 예루살렘을 침략할 때, 침략자(폼페이우스)를 지지하여, BC 63년 다시 왕으로 복귀했다. 

유아대학살을 명한 헤롯대제(=위키백과)

  이때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 2세는 힐카누스 2세를 지지하고, 침략자 폼페이우스에게도 뇌물을 공여하여 신임을 얻어, 유대의 실세로 등극하는 처세술을 보였다. 이 시기에 로마에서는 BC 60년경 ①크라수스(BC115-BC53)와 ②폼페이우스(BC106-BC48)와 ③카이사르(시저, BC100-BC44)의 삼두 정치가 시작되었다. 차례대로 살펴보면, ①크라수스는 BC 71년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한 공적이 있었고, BC 53년에 파르티아(페르시아 지역)를 정벌하러 갔다가 전사했다. ②폼페이우스는 BC 67년, 지중해 해적을 3개월 만에 토벌했고, BC 66년에 소아시아(터키/시리아 등) 지역의 지휘관이 되어, 시리아를 점령하고, BC 63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한편, ③카이사르는 자수성가형 귀족으로, 원로원의 경계와 방해로 집정관(=통령=콘술, 최고 통치자)이 되는 것이 어렵게 되자, BC 60년에 당시 공적이 많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와 동맹을 맺어, 원로원의 방해를 넘어 집정관이 되었다(BC 59년). 동맹을 위해 카이사르는 딸(율리아)을 폼페이우스에게 시집을 보냈고, 동맹자 폼페이우스가 요구한 퇴역군인 토지보상법을 제정하여 정치적으로 보상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퇴임 후, BC 58년에 갈리아(프랑스 & 독일)지역 총독으로 임명되어 넓은 갈리아 지역을 평정했다. BC 54년에는 영국도 공략했고, BC 50년까지 갈리아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고, 로마로 귀환하게 되었다. 이때, 카이사르의 대중적 인기에 위협을 느낀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BC 49년 1월)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하며,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자, 당황한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후퇴했다. BC 48년 8월, 파르살로스(그리스) 평원에서 결전이 있었는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 비하여 병력이 월등히 우세했으나 크게 패하여 이집트로 도망갔다가, 이집트에서 암살을 당했다(BC 48년 9월 29일).이집트까지 추격했던 카이사르는 이집트 왕위분쟁에 개입하여, BC 48년에 크레오파트라 7세를 공동 왕위에 오르게 하는 과정에서, 기존 이집트왕 프톨레미우스 12세의 반발로, BC 48년 말에 알렉산드리아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카이사르는 동행한 병력이 많지 않아 위기에 빠졌는데, 이때 안티파터 2세(헤롯의 아버지)가 카이사르를 지원하여, 카이사르를 위기에서 구하고 전쟁 승리의 동력이 되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카이사르는 안티파터 2세(헤롯의 아버지)를 BC 47년에 유대 행정장관(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이는 헤롯가문의 유다 통치의 시작이었다.

지오토 디 본돈(1267~1337) 『3인의 동방박사의 경배』

BC 47년 유대 행정장관(총독)으로 임명된 안티파터 2세(헤롯의 아버지)는 첫째 아들 파사엘에게는 예루살렘 지역을, 둘째 헤롯대왕에게는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BC 43년 안티파터 2세가 정적에 의해 암살당하자, 헤롯대왕은 형 파사엘과 함께 유다 지역(예루살렘)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었다. BC 43년 당시 서른 살이던 헤롯대왕은 민첩하고 정확하게 정세를 파악하고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으며, BC 42년에 안티고노스 2세의 공격도 막아냈다.(안티고노스 2세는, 아버지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함께, BC 63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로 끌려갔다가, BC 57년에 풀려났다) 집념의 민족주의자 안티고노스 2세는 BC 40년에 파르티아(페르시아 지역)왕국의 지원을 받아서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이때 헤롯대왕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로마로 도망쳤으나 형 파사엘은 사망했다. 로마로 탈출한 헤롯대왕은 안토니우스의 천거로 로마에서 BC 40년에 유대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로마는 2차 삼두 정치 시기였다.(①옥타비아누스 ②안토니우스 ③레피두스) 참고로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권력투쟁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여 아우구스투스)라는 황제 칭호를 받았는데, 성경에는 가이사 아구스도로 표현된다. 즉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이사 아구스도는 동일 인물이다. 다시 돌아와서, 헤롯대왕은 BC 39년에 로마의 병력과 함께 유대로 귀환하였다. 헤롯대왕은 BC 38년에는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유다 지역을 장악했다. BC 37년 봄, 헤롯대왕은 로마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5개월 만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안티고노스 2세를 처형했다. 드디어 BC 37년에 헤롯대왕(재위 BC37-BC4)은 헤롯가문의 시대를 열었다.

 

서동호 장로(울산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