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지인이 있다. 평소에 반듯하게 살려고, 이웃을 해치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애쓰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어느 날 지인이 찾아와 “얘기를 하자”고 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자기 자녀가 “학폭에 연루되어 가해자가 되었다”고 한다. 가해자이다 보니 그 학교에 다닐 수가 없게 되고, 같은 지역에 사는 것도 부끄럽게 되어 아주 먼 곳으로 이사를 결정했다고 한다.
자기 자녀가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역시 자녀는 부모 마음대로, 기대대로 자라지도 않는 법임을 절감했다.
그때 나는 그 지인에게 전한 말이 있다.
“부모가 자녀 때문에 울지 않으면 언제 울겠는가? 생각해 보면, 내가 평안하고 무탈할 때는 이웃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이웃의 눈물이 나의 눈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데 자녀 때문에 절망했다. 그제서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자신의 무능력을 절감한다. 비로소 하나님이 떠오른다. 그동안 자신이 능력자인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제서야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그동안 땅의 것을 이루고, 그것을 지키느라 하늘을 보지 못했다. 그제서야 이웃의 눈물이 나의 눈물로 다가오게 된다. 그동안 이웃의 눈물을 공감하지 못했다.
그렇다. 자녀를 통로 삼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절망 앞에서 섰을 때, 그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자녀로 인해 자신의 마음이 가난해지고 궁핍해지고 곤고해진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때 하나님 앞에서 그 친구가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은 무엇일까? “주여, 불쌍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가난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자신을 선한 시민이라 생각했으나 그런데 절망 앞에 서 보니 자신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 앞에 드릴 것도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때 발견한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했다는 것을. 이 가난함(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파산)을 경험하고 고백하고서야 더 이상 자신이 가진 것을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그렇다. 절망한 자만이 가난해지는 법이다. 내 계획이 무너져야 하나님이 보이는 법이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어야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이다. 그제서야 하나님이 보이고, 그제서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는다. 그제서야 영적 파산, 영적 가난함을 절감하고, 그제서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채워가는 ‘출발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시작점이 된다. 어떻게요? 절망을 통해서. 또, 내가 없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그렇다면, 절망을 안겨준 그 자녀는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이끈 하나님이 선물인 것이다. 자녀의 변화가 아니라, 나에게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이다.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의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은 절망을 도구 삼아 그 지인을 만나 주시고, 그에게 천국이 임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 친구가 보이는 반응은 ‘눈물’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눈물이다. 주님은 이를 ‘애통함’(πενθέω 펜데오)이라고 부른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게 우는 것을 말한다.
그동안 주의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한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죄인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 죄가 나를 하나님과 단절케 했음을 고백한다. 내가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교만이었고, 자신을 주님의 거룩함에 비추어보니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죄를 자복한다. 그 때부터 진정한 회개가 시작된다.
회개의 시작은 하나님의 위로가 시작이기도 하다. 어떤 위로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담당해 주셨다는 위로이다. 울고 있는 나에게 찾아와 그 눈물을 가져가심으로 위로해 주신다. 즉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해 진 자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애통함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절망 가운데 있어 눈물 흘릴 때, 절망을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자녀이든, 직장이든, 질병이든 관계이든, 반드시 주께서 위로해 주신다. 그 위로는 그 절망을 감당하는 힘이 된다.
지금,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을 감당하고 있다면, 지금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십자가를 지나? 그것은 성령 하나님이 위로하시니 가능한 것이다.
# 맺음말
지금 내가 마주한 절망은 나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이끌기에, 그 절망은 궁극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복이 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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