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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6.25전쟁과 한국교회의 역할 “절대 절망 속에 피어난 작은 희망, 한국교회”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아들을 앞세우고 세간을 지고 고향을 두고 길 떠나는 피난민가족이다.

  6.25 노래 속의 이 가사는 우리 민족의 절규이자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되는 끝나지 않은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 74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의 현실은 6.25 전쟁을 단순히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잊혀진 전쟁으로 간과되고 있는 실정이다. 6.25 전쟁에 참전한 백골부대 제18연대 제1대대 소속으로 당시 일병이었던 신동수 씨는 과거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6월 25일만 가까워 오면 내가 묻어준 동료들, 내 앞에서 죽어간 동료들이 떠올라요. 군번도 없이 죽어간 전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그걸 알고 있나요?”

    비록 국민의 80% 이상이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전후 세대들이라고 할지라도 전쟁을 억제하고 통일 시대를 대비하며 국가 안보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6.25 전쟁의 끔찍한 실상과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6.25의 참혹한 실상과 함께 절대적 절망 속에서 작은 희망의 싹을 틔웠던 한국교회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전쟁에 부모를 잃고 미군부대에서 허드렛일을 거들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과 함께 지난(至難)한 굴욕의 세월을 살아왔던 일제의 식민지는 종언을 고하게 되고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우리 민족은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었다. 당시 남한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민족적, 사회적, 사상적, 종교적인 갈등으로 끝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반면에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은 남한을 적화 통일하기 위한 적극적인 준비를 하나하나 진행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1990년 한국과 구소련의 수교와 함께 옐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때 가져왔던 구소련의 자료에 의하면, 1950년 3월 말에서 4월 중순 사이 소련의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서 남한을 침략하기 위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의 대화록에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공격은 신속히 수행돼 3일이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고, 스탈린은 그런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하였다. “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합니다. 남조선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강력한 저항과 국제적 지원이 동원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해방 직후 남한에는 좌익 공산주의에 편승하는 젊은 지식층이 많이 있었다. 때문에 1950년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의 스탈린을 방문하였을 때 김일성은 남조선 내 빨치산 운동이 강화돼 남침을 하면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박헌영도 남한에 20만의 남로당원들이 있기 때문에 이 전쟁은 빨리 끝날 것이라는 주장을 덧붙였다. 즉,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의 곳곳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에 동조하여 봉기를 일으킬 것이며, 이는 전쟁 국면에서 북한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김일성과 박헌영이 간과했던 중요한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교회였다. 북한의 공산주의 김일성 정권이 자유와 종교적 신앙을 박탈하고 일제보다 더 극심하게 종교적 탄압을 했다. 때문에 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이 북한 정권 아래에서는 더 이상 종교적 신앙과 자유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남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더구나 625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450만의 피난민들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이들이 남한으로 넘어올 때 그저 몸만 넘어온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북한 김일성 정권에서 종교적 탄압과 박해를 생생하게 경험하는 가운데 철저한 반공산주의와 보수주의 사상을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남쪽의 사람들에게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심각하게 일깨워주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국가 안보를 위한 반공적 보수주의에로의 사상적 무장을 더 확고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전사가 되었던 것이다.

군인행렬과 전선을 피해 피난하는 피난민이 서로 지나간다. (국사편찬위원회)

 한반도 전체를 거의 초토화한 6.25 전쟁은 세계에서 가장 비극적인 전쟁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이 전쟁으로 우리 민족은 인적, 물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남측에서는 사망자가 638,160명, 부상납치실종된 자가 1,499,065명에 이르렀다. 북측에서는 사망자가 884,279명이었고, 부상납치실종된 자가 3,328,763명에 달했다. 당시 한국 상황을 취재했던 미국인 기자 페이(Harold E. Fay)는 그 참상의 일면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추운 겨울 화재로 인해 겪게 되는 한 가정의 고난과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거주할 집이 없어 거리로 쫓겨나 낯선 사람들 틈에서 배고픔을 참으며 헤매는 그 고통을 누가 형용할 수 있겠는가? … 재앙에 대해 아무리 무감각해진 세대조차도 한국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6.25 전쟁으로 인한 끔찍한 참상을 감안한다면, 6.25 전쟁 발발 74주년을 맞는 오늘 대한민국의 실상은 한마디로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아니 꿈에서조차도 꿀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마치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이겨낸 성경 속의 이야기처럼, 작은 희망이 절대 절망을 이겨낸 것이다. 이는 6.25 전쟁이라는 극심한 혼란과 절망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기에 기능했다. 그 작은 희망의 중심에 바로 한국 교회가 서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빚어진 사회·정치적 혼란과 고통 속에서 한국 교회는 불안에 떠는 자들에게는 믿음을,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는 소망을, 상처를 입은 자들에게는 사랑을 주었다. 그리고 굶주린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집이 없는 자들에게는 보금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떡과 복음’, 그것은 혼란 속에서 분출한 종교적 열정과 세계 교회의 도움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였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바로 그런 토대 위에서 다시 세워진 것이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어언 74년이 되었다. 그 전쟁을 몸소 체험했고, 그로 인한 참상을 기억하는 자들이 역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정체성 수호를 위해 싸워 왔던 그들의 숭고한 희생도 몇몇 억지를 부리는 자들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오늘의 한국을 일구어낸 그들의 수고가 헐값에 방매 처분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일구어 놓은 열매는 좋지만, 그들은 좋지 않다는 식의 태도가 난무하고 있다. 당시 혼란의 와중에 희망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한국교회 또한 그런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오늘의 우리나라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겪었던 극심한 이데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이제 한국교회는 뒤틀린 거짓이 난무하는 이 땅에 또 하나의 희망이 되기 위해 진리의 파수꾼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74년 전에 6.25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와 교회가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기 전에 말이다. 무엇보다 과거를 외면하는 자는 미래의 영광을 향유할 자격 또한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주철 목사(언양영신교회 담임목사, 계명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