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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배려의 땅, 샤모니

 

 나는 가끔 포털 사이트에 뜨는 기사보다 그 기사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 댓글을 더 주목해 볼 때가 있다. 군중의 심리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분노 사회’라는 용어가 말해주듯 우리 사회는 누군가를 향해 일상처럼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포털 사이트를 클릭하자마자 우르르, 익명 뒤에 얼굴을 숨긴 분노의 댓글들이 쏟아진다. 때로는 그 댓글들이 상대적 박탈감과 사회적 소외감 때문에 내지르는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여겨져 안타까울 때도 있다. 성별과 세대, 계층과 지역, 지지 정당을 따라 각자 느끼는 피해의식이 깊고, 사회적 이슈에 따른 마녀사냥과 책임 전가도 난무한다. 가끔은, 스트레스 해소용 먹잇감을 찾다가 포착되자마자 한꺼번에 달려드는 사바나의 풍경을 보는 듯해 아찔하다.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지만, 조절되지 못한 채 내부로 향하면 우울감에 빠지게 되고 외부로 향하면 희생양을 찾게 된다. 사람 안에 일어나는 분노의 요인을 객관적으로 탐색해 들어가 보면 상당 부분 이기심에서 출발할 때가 많다. 남을 탓하며 나는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리가 크게 작용한다. 상대적인 우월감은 굳건히 지키고 싶고, 열등감은 타도하고 싶은 심리도 배제할 수 없다. 타인의 슬픔에는 깊이 동정하지만, 타인의 행복은 깎아내리려는 우리 사회의 모습도 이기심에 기반할 테다. 분노어린 댓글 홍수를 대할 때마다 마음속에 그려지는 여행지의 풍경이 있다. 타인을 배려하는 땅, 프랑스의 샤모니 마을이다.

 샤모니는 알프스의 한 봉우리인 몽블랑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마을 이름이 ‘샤모니몽블랑’이라고 불리는 이유기도 하다. 만 명이 채 안 되는 인구에 청정 자연환경만으로 부러운데, 풍경이 어느 인상파 화가의 명화 속으로 들어와 있는 듯 아름답다. 깨끗하게 조성된 목조 주택들 사이로 화사하게 피어있는 여름꽃들과 주민들의 여유로운 표정이 방문객의 마음에 평안을 선물했다. 단풍나무 우듬지 위로 천천히 떠다니는 구름과 함께 시간도 잠깐 쉬어가는 듯했다. 사람의 마음을 위무하는 따뜻함과 온유함이 샤모니의 첫인상으로 다가왔다. 몽블랑 봉우리 정상에서 조망하는 알프스의 위용과 압도적 설경 앞에서는 창조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지만, 샤모니의 풍경 안에서는 위로의 하나님을 느끼게 된다. 직장생활 중 분주하고 힘들 때마다 머릿속으로 떠올린 풍경도 샤모니였다. 

창조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샤모니 마을 (사진= jstart23의 네이버 블로그에서)

  그렇다고 샤모니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아름다운 첫인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타인을 배려하는 주민들의 성숙한 태도에 반했다. 모든 주택마다 외부 테라스와 베란다가 있는데 예쁜 화분을 하나같이 바깥쪽으로 배치해 두어서 여름의 샤모니는 꽃천지였다. 마을 길을 천천히 산책하는 것만으로 마음에 큰 위안이 됐다. 화초를 키울 때 베란다 안쪽에 두고 주인만 감상하는 한국의 정서와 사뭇 달라서 놀랐다. 동양이 주변 산수까지 내 집 풍경 안으로 끌어와 가족이 향유하는 문화라면, 서양은 내 집의 인테리어를 외부로 개방해 타인과 공유하는 문화라는 게 느껴져 무척 부러웠다. 동서양 문화의 특성과 우수성이 각각 다르지만, 이 부분만은 닮고 싶었다. 마음의 여유와 배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샤모니도 사람 사는 땅이라 당연히 불완전한 곳이지만 적어도 삶의 목적이 성공이 아닌 나눔에 있는 것 같아서 흐뭇했다.

  과연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좋아지면 비난이나 분노가 사라질까, 가끔 생각해 볼 때가 있다. 타인의 불행은 물론 행복에도 공감하는 여유로운 공동체를 그려보지만, 머릿속 물음표는 여전하다. 상대적 박탈감과 사회적 소외 문제 해결은 우리의 막중한 과제이지만, 내가 갖지 못한 것이면 무조건 분노의 대상이 되는 사회가 치유되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사회 구성원들이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도 타인과 나의 고유한 개별성을 기뻐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도하곤 한다. 천국(하나님 나라)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놓여있다. 예수님을 통해 천국이 ‘이미’ 왔지만 ‘아직’ 완전히 오지 않은 세상 속에 성도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타인을 향한 성도들의 작은 배려 하나-격려와 칭찬의 말 한마디, 따뜻한 커피 한 잔의 대접, 상대의 장점을 인정하는 태도, 개별성의 존중-로 우리 사회는 천국을 조금 더 깊이 느끼게 될 테다. 

  때때로 여행은 내 삶의 태도를 돌아보는 일이다. 개인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내가 속한 사회의 영향을 받고 사회의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체화하며 살아간다. 사고와 감정이 고착된 나를 발견한다면 가끔은 익숙한 공간을 떠나 새로운 세계를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 ‘익숙한 의식과 태도를 환기하고 나를 객관화 화는 작업’, 이것이야말로 여행의 바른 정의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