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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인간의 한계와 가정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먼저, 가정을 만드시고 그다음에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아무것도 없던 혼돈의 시대에 빛으로 질서를 잡으신 하나님은 6일에 걸쳐 천지를 조각하셨다. 하루의 창조 사역이 끝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하셨다.  그리고 6일째 되는 날 모든 생물을 만드신 후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그리고는 남자와 여자를 불러 결혼 주례를 하시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게 하셨다. 그들은 옷을 벗고 있었지만 부끄럽지 않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간극 없는 진실 그 자체의 삶을 살았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단 하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기사항이 있었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한 것 같아도 하나님처럼 절대 될 수 없는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그림_AI)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그만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다. 창조주 하나님은 첫 사람을 특별하게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으니, 사람을 ‘영적 존재’로 지으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창조의 능력을 담아주셨다. 모든 동물은 환경의 영향에 따라 사는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본능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영적인 존재인 사람에게는 창조의 능력이 주어져 있고 각기 사명도 주어져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2:19)

 

  대단하지 않은가? 이처럼 하나님의 대리자로, 창조적인 능력으로, 영적인 능력으로 살아가지만, 선악과로 한계의 법을 따라야 하는 존재가 사람인 것이다. 온갖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지만, 선악과의 법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하는가?’ 모든 피조물 앞에서 하나님처럼 살다가도 선악과 앞에서는 자신을 살피고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받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어야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에게 다스림을 받은 피조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지어주고 다스리는 아담을 하나님으로 여기며 순종한다. 그렇게 아담을 최고로 여기다가 선악과 앞에서 경건한 자세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담을 볼 때

  우리를 다스리는 아담이 하나님이 아니고 참 하나님이 따로 계시는구나!

  모든 피조물이 그제야 하나님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한계를 사람에게 정해주신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이 있는 대로, 권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이 있는 대로 각자 자신의 한계 앞에 서야 한다. 인간의 능력이 제아무리 대담해도 자연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비 한 방울도 이슬 한 방울도 오게 할 수 없다. 돈이 있어도, 권력을 다 가져도, 아무리 건강해도 인간은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나이 마흔이 되고 쉰을 넘어 예순이 되면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고백해야 하는 진리가 있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철이 없을 때는 무엇이든지 마음먹은 대로 다 되는 줄 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잘 살 것 같은 착각에 산다. 그러나 살다 보면 누구나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아내가 남편을 바꾸어 보려고 각방을 쓰고 친정을 다녀오고 이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도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그 이유는 만고의 진리인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은 한계에 부딪혀야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능한 존재일 뿐이요, 부부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창조주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첩경인데 오늘날 우리 사회와 가정은 대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 가정의 중요성을 새삼 이야기 할 필요도 없지만 오늘의 시대 조류가 가정 붕괴로 이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움을 넘어 파멸을 보는 것 같다.

 경제발전도 좋고 사회복지도 좋지만 인성을 타락시키는 살벌하고 극악한 사회풍조를 바로잡는 노력은 더 시급하다. 사회의 타락은 가정의 타락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윤리와 도덕을 갱생시키는 새바람이 일어나야 하고, 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근본적으로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약을 처방해도 그 병은 고쳐지지 않는다. 약을 쓰기 전에 처방하고 수술할 부분은 도려내야만 제대로 병을 고칠 수 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마12:33)는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세상의 제도를 바꾸고 환경을 바꾸고 교육을 해도 소용이 없지 않겠는가? 결혼을 하지 않고 자녀를 낳지 않는 지극히 이기적인 우리에게 소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가정을 세우시고 가정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깨달아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가정이 확장 된 곳이 교회이고, 교회가 축소된 곳이 가정이다. 결국 가정회복은 교회의 회복과도 같다. 말씀의 터 위에서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섬길 때 비로소 우리는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5월에 모든 가정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기를 기도한다.

옥재부 목사(북울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