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침잠되지 않는 부활의 소망
주어진 삶을 은총으로 누리며, 내일의 소망을 오늘로 선취하다
저자와 만난 것은 십 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천곡동의 골짜기에 넓은 밭을 품은 못난이 전원주택에 세 들어 살 때입니다. 천곡동에서 목회와 더불어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창작활동의 정점에 계실 즈음에 여러 모양으로 조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자를 떠올릴 때마다 호방한 너털웃음소리가 생각납니다. 군소리 말고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는 뜻의 ‘끽다거’에서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차를 우려내던 기억이 살아옵니다. 목회사역을 내려놓은 다음에도 저자의 창작의 세계는 더 깊어져가는 것 같습니다. 순한 봄날의 꽃이 지고, 싱싱하고 힘 있던 여름날의 문자가 험한 세파와 고독 속에서 진하게 익어 있습니다.
이창희 시인은 경남 합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목사로 임직되어 은퇴 때까지 30년간 목양일념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목회 중에도 소년시절부터 품어왔던 문학과 시에 대한 씨앗을 놓지 않았고, 1985년 『월간문학』신인상과 『부산문화방송』 신인문예상으로 등단하여 문학의 길을 이어왔습니다. 처녀작『사람이 되려고』를 시작으로 『다시 별 그리기』와 『사인 탑승』, 목회 은퇴 즈음에 출간된 『고맙다』를 출간했습니다. 이번이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 됩니다. 목회의 여정이 고단했다하나 기실 젊은 시절의 부마항쟁으로부터 교통사고로 두 번의 생사를 오가는 경험은 삶의 전회를 넉넉히 가져오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고통 속에 진주 생성되듯, 고독과 삶의 끝자락을 매만지는 시간 속에 빚어낸 주옥같은 시들이 담겼습니다.
본 시집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그림자를 보내며」에서는 삶의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야 열리는 시선과 생사의 고비에서야 실존적으로 깨닫게 되는 마음들이 시가 되어 담겼습니다. 그는 죽음이라는 최고 악, 절망을 피해가지 않고 깊숙이 파고 듭니다. 그럼에도 죽음에 침잠되지 않는 부활의 소망이 배여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오지요/쓰다듬는 죽음의 손길을 느껴요/감 홍시가 떨어지기 전에/더 빨갛게 타는 것처럼,/견디느라 애썼다/다정한 바람소리가 들려와요’ 「죽음이 사는 집」. ‘철주 행님은 우찌 사노//아이구, 우짜노//우리 누님은 돌아가싯다//우리는 얼마나 남았을꼬//그래,//마시라//식는다’ 「첫사랑」. ‘춘분을 지나/보름달 떠오른 날/애벌레는 허물을 벗고/흰나비 호랑나비 날아오르는데/친구야. 이즈음 우리도/허접한 것 벗어버리고/꽃동네 그리던 본향/날아가지 않을 텐가’ 「오시는가 봄비」. ‘목숨을 흙 속에 묻으면/젖니가 돋아나듯 촉을 내고/햇보리처럼 푸른 모가지/뽑아 올릴 수 있을까요’ 「그림자 흙에 묻으면」.
한 잎 두 잎
낙엽이 지는
약수터 숲속 길을
울면서
살다 갈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고,
네 등불
아주까리기름은
얼마나 남았느냐고
-「한로절 솔 매미가 울어」 전문
2부 「바람이 분다 시가 온다」에서는 삶의 구석구석에서 돋아 오른 시상들을 담고 있습니다. 은퇴 후의 고독과 그리움이 처진 어깨에 내려앉고, 노년의 눈에 밟히는 가을풍경이 애잔하게 여운을 남깁니다. 인생이 주는 단맛과 쓴맛 모두 짧은 시에 꾹꾹 눌러 담겼습니다. 그의 고백과도 같은 눈물과 고독이야기가 도리어 독자에게는 위로로 다가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눈물로 빚어낸 시가 없다면 삶은 사막이 되고 말겁니다.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중에도 연명되듯 주어진 삶이 은총으로 누리며, 내일의 소망을 오늘로 선취하고 있습니다.
‘그냥저냥 살게 두는 것은 은총이다/누추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기적이다’ 「기적이다」. ‘두렵지 않다/다석多石이 그랬던 것처럼/매일 밤마다 죽고/매일 아침마다 다시 소생할 것이며/우리들의 내일은 이로써 지속될 것이다’ 「어제 나는 죽었다」. ‘체휼體恤한 그 은혜를 추억하며/생신 잔치를 합니다/너무나 아리고 고맙고 북받쳐서/고개를 들지 못합니다/나의 맏형/인자人子 예수’ 「그 사정 내가 안다」. ‘스스로 왕관을 쓴 것들이/서로에게 별을 달아주는 시절입니다/깡통별 모서리에 상처받은 이들은/오늘도 신음소리로 댓글이나 답니다//이러한 동안 삭풍이 부는 시절 흘러가고/이윽고 훈풍이 불어오면/봄 햇살은 남북동서 구별 없이/꽃등을 밝히겠지요’ 「놀란 듯 피어난 풀꽃 세상」.
3부 「나는 어디로 갔을까」에서는 시인이 겪어왔던 극한의 투쟁과 처절하게 사투했던 현장을 담고 있습니다. 냉전의 시절은 아득히 지났건만 여전히 남북대치의 현장을 보여주는 「다시 휴전선 부근」과 사람이 아니라 짐승취급 당했던 부마항쟁 투쟁의 회상을 담은 「짐승들의 시」가 그러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담고 있지만 한없이 깊게 다가오는 그의 사유는 좌우충돌의 기괴함에 경도된 사상을 되짚어 보게 하고, 따뜻하게 마음을 풀어놓을 곳 없는 시름하는 현실을 아프게 들춰냅니다. 반짝이는 불빛에 속아서 돌아볼 틈 없이 질주하는 삶을 멈추어 서게 하는 요철과도 같은 시상들입니다.
‘외로운 것이다/등 뒤에서 파문 져 오는 잡담이/등뼈에 철썩거리는 것은/내 속엣말이 썰물지고/망설이며 밀물지는 너 말이/질펀한 뻘밭을 만나지 못한 탓이다//외로워서 바다를 만나러 갔다가 우는 파도를 안고 돌아오다’ 「일광 블루스」. ‘어느덧 황혼 무렵/우리들이 가꾸던 텃밭에 서리가 내리고/별빛도 흐미해 졌지만/오랜 우물처럼/열무김치 서러운 맛이 나는 것 같아’ 「애가哀歌-아내에게」. ‘비 맞으러 일광 바닷가로 나가지/같이 훌쩍거리는 소리를 듣는 일/괜찮다 괜찮아 파도는 잔소리를 해대고/너나 잘해 구겨지지 말고,’ 「비가 내려서」. ‘살고 보면 사는 일/물소리 그 한 필인 것/이두박근 힘 모아서/뼈의 상앗대 고쳐 잡고 어허야,/오늘도 꿈길을 튼다/쪽진 낮달이 흐르는 강심에/명주실 목숨을 건다’ 「뱃사공 분도의 아침」.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여상하게 떠오른 햇살에 슬픔을 망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슬픔에는 출구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슬픔 중에도 기쁨을 두신 까닭입니다. 인생의 노후가 쓸쓸한 것은 그만큼 삶이 좋았다는 증거입니다. 아픔과 신음소리 가득한 땅임에도 지구의 궤도는 조금의 이탈도 없습니다. 주께서 주신 소망이 넉넉히 균형을 잡아주기 때문일 겁니다. 주께서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신다는 시편기자의 고백은 조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7habit의 저자 스티븐 코비는 조언합니다. “끝을 보고 시작하라!”고 말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기 전 삶의 끝을 향해 있는 원로의 지혜를 가슴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이종인 목사(울산언약교회,울산대학교 철학교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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