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계명 너는 내 면전에서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10가지 말씀의 근원인 ‘사랑’,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
완전한 자유와 온전한 사랑을 원한다면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자
요즘 포털사이트에서 십계명을 검색하면 다양한 십계명들이 존재한다. 사랑의 십계명, 부부생활 십계명, 행복 십계명, 인생 십계명 등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든, 안 다니는 사람이든 십계명을 마치 성공비결이나 공식처럼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서 십계명을 가르치거나 외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외우거나 우리는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고백이 담긴 사도신경을 외우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예배시간에 십계명을 암송하는 모습은 주일학교든 장년예배든 보기 드물다.
이렇듯 십계명을 예배시간에 외우는 순서가 있거나 따로 시간을 들여서 배우는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예배에 있어서 찬양과 기도와 고백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십계명은 딱딱한 법조문 같아서 예배 흐름을 방해하므로. 둘째, 예수님이 오심으로 복음을 완성하셨기에 옛 언약 같은 십계명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서. 셋째, 오늘날 십계명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당연히 실천하고 있어서 일부러 외우거나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함. 이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대인에게 십계명은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처럼 십계명이 현대인들에게 매력이 없는 이유를 백석대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쳤던 류호준 교수의 진단을 인용해본다. 십계명을 좋아하지 않는 추세는 시대정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속박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의 독립적 경향들, 좀 더 개인적인 성향의 취미 종교를 권유하는 할리우드적 세계관, 어떠한 행위를 ‘죄’라고 부르기 보다는 ‘병’으로 부르기를 원하는 현대인들의 정신 병리학적 심성, 도덕적 훈화보다는 정신적 치료를 선호하는 나르시스적 인생관,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과학적 현대인에게는 적합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세속주의, 세상에는 절대적 진리나 도덕적 규범이 있을 수 없다는 상대주의 등은 직간접으로 십계명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조장하여 왔다.
또한 십계명을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방적인 명령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사실은 명령이 아니라 10가지나 되는 말씀을 약속으로 주셨다. 애굽에서 탈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사람들에게 10가지나 되는 재앙을 주셨지만, 하나님께서 구별한 사람들에게는 10가지의 말씀을 주셨다. 십계명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과는 구별되는 방법이며, 세상과 구별되었을 때 주어지는 자유를 보장하는 말씀이며, 그 말씀을 지킬 때 모든 민족 가운데서 보물이 되고,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다(출19:5-6). 이처럼 십계명은 죄와 사망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자유의 헌장이자, 하나님께서 구별한 사람들이라는 증표와 같은 명령이 아닌 말씀이다.
이런 하나님의 열 가지의 말씀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구별한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이 10가지 말씀을 을 본 지면을 통해 한 말씀씩 살펴보고자 한다. 명령이 아닌 말씀으로 접근하여 살펴보겠지만, 독자의 이해를 위해 보편적인 단어로 계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딱딱한 명령(계명)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으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모세의 때에는 돌판에 새겨진 말씀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열 가지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으면 한다. 때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원문에 가까운 단어와 문장을 사용할 때가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왜 이 단어와 문장이 원문에 가까운지 그 이유까지 설명을 다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면의 분량이 정해져 있으므로 설명이 없더라도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하나님의 10가지의 말씀의 가장 근원적인 출발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이는 부부사이로 설명 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여 결혼을 하고 한집에 살게 되었다. 매일 사랑 고백을 주고 받으며 달콤한 신혼의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남자와 여자 둘 중 한 사람이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고 외박을 일삼다가 마침내 다른 애인을 신혼집에 데리고 와서 같이 살겠다고 면전에 대고 선언을 한다. 더 기가막힌 것은 애인과 함께 지내면서 그는 여전히 이런 고백을 한다. “여보,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나 당신만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아요? 내 마음을 오해하지는 마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불타는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정상적인 부부라면 이 고백을 듣고 황홀함을 느끼거나 감동을 받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부부의 관계는 그 즉시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리고 말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상숭배는 바로 이런 부부생활과 같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함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위해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 일방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해 주시고 그만큼의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절실하고 충성된 순도 높은 관계의 사랑을 원하셨기에 그 사랑은 죽음보다 강력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머물러 있을 때 진정한 자유가 있다. 사람은 무엇에든지, 어디에든지 의지하고 싶게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하나님만 온전히 사랑하지 않으면 어디에든지 의지하고 기대고 사랑하게 되어있다. 사랑의 대상이 돈이 될 수도, 명예가 될 수도, 친구가 될 수도, 아내나 자녀가 될 수도,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사랑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만 온전히 사랑하는 자리에 더 사랑하는 대상을 두게 된다면 완전한 자유는 깨져버리고, 그 사랑하는 대상에 메이는 노예가 된다.
완전한 자유와 온전한 사랑을 원한다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자(신6:5).
김보민 목사(함께걷는교회)
*다음호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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