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은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금년으로 광복 77주년을 맞게 되었는데, 뒤돌아보면 우리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게 된 것은 우리의 외교적 노력이나 군사적 힘으로 얻은 결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예상치 못한 가운데 해방을 맞았기에 함석헌은 “해방은 도적같이 왔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일본이 1945년 7월 26일 미, 소, 영, 중 연합국이 포츠담선언에서 결정한 항복 권고를 받아드린 결과였고, 카이로선언에 따라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 독립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히브리 사가들은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며”(시126)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인정했다. 영국의 이신론(Deism)은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되 하나님의 역사 간섭은 부인하고 역사는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일 따름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은 창조자일 뿐 아니라 역사의 통치자라고 말하고 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시31:14)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이도 하나님이셨고, 그를 애굽의 통치자로 삼으신 이도 하나님이셨다(창45:8).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포로민들에게 해방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셨다(대하36:22, 스1:1). 볼테르는 “역사는 인간의 그림자”라고 하여 인간이 역사의 주체인 것처럼 말하지만, 성경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마10:29)고 말한다. 그러했기에 시편 기자는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My times are in thy hand)라고 하나님이 역사 간섭을 인정했다(시31:14). 포로된 백성에게 자유를 주신 이는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리 역사는 비슷한 점이 많다. 우리의 조선(Chosun)이 ‘선택된 백성’(chosen people)을 의미한다며 유사성을 넘어 동일기원설을 말하는 선교사가 있었을 정도였다. 생활관습의 유사성만이 아니라 고난의 역사, 타의에 의한 해방, 분단도 유사했다. 바벨론에 포로된 유대민족처럼 우리의 해방도 우리의 정치적 수완이나 군사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은혜였기에 백범 김구 조차도 일본의 항복이 너무 일찍 찾아왔다고 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주도로 조국해방을 얻었다는 소위 ‘김일성 조선해방설’을 말하지만 의도적 거짓이다.
잔인한 식민통치의 흔적을 은폐하려는
민족대학살을 하루 앞두고 광복을 맞이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건!’
하나님의 간섭이다
1945년 8월 17일 늦은 밤, 신사참배 거부로 마지막까지 투옥되어 있던 26명이 출옥했다. 신사참배는 1935년부터 강요되었고 이를 거부했던 2천여 명이 투옥되었는데, 이중 40여명은 옥중에서 순교했다. 그런데, 대동아전쟁 초기 일본은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까지 전선을 확대하면서 승세를 떨쳤으나 곧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패전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미국이 사이판을 점령한(1944. 7. 7) 후 전세는 급변하여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다. 미국이 1945년 2-3월 유황도(硫黃島), 6월 오끼나와(沖縄)를 차례로 점령하면서 일본 본토 상륙을 준비하자 일제는 한국교회와 민족의 지도자 다수를 학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잔인한 식민통치 흔적을 은폐하려는 의도였다. 당시 조선총독 아베의 ‘조선총독부 보호관찰령 제3호’ 지령에 의한 학살 예정일은 1945년 8월 18일이었다. 그런데 이 음모가 결행되기 3일 전인 8월 15일 해방이 왔고, 처형대상자들은 8월 17일 늦은 밤 12시 경에 석방되었다. 처형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바로 그 전날 밤이었다. 학살음모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건이 된 것 또한 하나님의 간섭이었다.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건국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1948년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건국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해방과 함께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한 후 김일성을 앞세워 공산정권을 수립하였고, 기독교를 탄압하여 교회가 폐쇄되고 김화식, 김인준, 이정심 목사(이상 1947년), 김철훈(1948), 이유택 목사(1949) 등 교회 지도자들이 피살되었다. 1947년 말까지 80만 명에 이르는 북한 주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월남의 길을 선택한 것은 공산주의 정권의 실상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남한에서 미군은 북한에서의 소련군보다 한 달 늦은 9월 7일 제24군단 소속 제7보병사단이 인천으로 상륙하였다. 이튿날 서울에 입성 한 이후 점차 남한 일대에 주둔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미, 소 양군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한 것이다. 원치 않았던 분단은 한국민족의 분열과 비극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9월 9일 남한에 주둔한 미군 사령관 하지와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사이의 항복 조인이 이루어짐으로써 35년에 걸친 일본의 조선 지배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제 미군이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였다. 남한에는 북한과 달리 정치적 자유가 주어졌으므로 여러 정당이 창당되는 등 정국이 혼란했다.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중심의 한국민주당, 안재홍 중심의 국민당, 여운형 등의 조선인민당,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 등 50여개 정당이 난립했다.
이승만은 10월 16일 미국에서 귀국하여 10월 23일에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1945년 11월 귀국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지닌 김구와 한국독립당도 해방정국의 주요한 정치세력이었다. 표출하는 정파 간의 이견과 대립으로 해방정국은 혼란했고, 국토의 분단, 경제구조의 파탄으로 경제적으로도 무질서 했다. 북한에서 넘어온 월남인구와 해방을 맞아 중국이나 일본에서 귀국한 인구가 2백만이 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48년 2월 26일 모인 유엔소총회에서는 유엔한국위원단 단장 인도대표 메논(V K Menon)이 제시한 ‘가능한 지역에서 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정부 수립’을 결의하였다.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래서 남한에서만의 독립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월요일 실시된 총선거를 통해 198명의 의원을 선출하였고, 5월 31일 국회를 개원하게 되었다.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국회개원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며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감사기도로 문을 연 대한민국 국회
대한민국 국회는 기도로 출발했다. 제헌국회는 즉시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고, 헌법 절차에 따라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8월 15일 정부수립이 선포됨으로써 대한민국이 성립된 것이다. 그해 12월 12일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는 찬성 41, 반대 6표라는 절대다수로 대한민국 정부가 한국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결의(제195-III호)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한반도 상의 유일한 합법국가로서의 정통성을 확인 받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반공주의(反共主義) 노선의 벙부를 수립한 것이다. 해방 전후를 뒤돌아볼 때 해방을 주시고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정부를 수립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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