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집/특별기고

거리두기 해제

 

  사람들은 너무 가까이 하며 살아간다. 도시가 발전하고 산업과 문화가 발전하면서 한데 모여 편리한 생활을 끝없이 추구한다. 하지만 그 속엔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인 이해타산으로 얽혀있다. 탐욕, 이기심, 시기질투로 서로를 넘어뜨리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부패하고 부조리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없다.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이 아니더라도 물리적 거리가 조금 멀면 어떤가. 우리가 만든 우상과 같은 문명과 문화와도 거리를 두어 조금 덜 가까이 한다고 소통하는 데 무슨 걸림이 있을까. 촘촘한 그물처럼 밀착되어야만 뜻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기엔 인간의 파열음이 난무하고 아귀다툼만 더해질 수도 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실 때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왜 모세와 ‘물리적 거리두기’를 하셨나?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오는 모세에게 백성들은 데리고 오지 말라 하셨다. 죄가 있는 백성이 하나님께 가까이 오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철저한 거리두기였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우리를 가까이 하시길 기뻐하시고 우리와 친밀하길 원하시는 데도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거리두기를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단번에 뛰어가시지 않고 ‘시간의 거리두기’를 하셨다.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시려는 목적이었다. 하나님의 일이란 시공의 거리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죽은 나사로에게 단번에 가시지 않고 시간을 두신 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물리적으로 가까이 계셔도 ‘언어의 거리두기’를 하신 때가 있었다. 간음한 여인이 붙잡힌 현장에서 즉시 말씀을 하시는 대신 침묵과 글로 땅바닥에 뭔가를 쓰셨다. 그때 여인을 돌로 치려던 군중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목소리로 직접 말을 하는 것만이 뜻을 전달하거나 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의 거리를 둔 글과 침묵이 오히려 더 깊은 뜻을 전달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셨다. 


  거리두기는 스스로를 성찰하며 회개하는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고 자기 자신과의 내밀하고 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다. 이참에 세상문화와도 거리두기를 하며 제거해야 할 것을 제거하고 더해야 할 것을 더하기로 꿈꾸며 도전할 수 있어야겠다. 


  아름다운 가을이 오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있은들 무슨 대수랴. 다만, 섞이면 안 되는데도 섞여버린 이 세상과의 가깝디가까운 물리적 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또 세상과 기독교 사이에 높디높아진 심적, 영적 거리는 어떻게 하나.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이때를 적기로 선용해 골방으로 들어가 하나님과의 거리두기를 해제시켜야 한다.



설성제 집사
태화교회
울산의빛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