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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발행인칼럼

6.25를 잊었는가

 

  나는 1955년생으로서 6.25를 겪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고향이 거제도 고현인터라, 관련된 여러가지 경험이 많다.

 

  거제 고현 일대는 난민들을 수용했던 ‘제7포로수용소’ 자리였다. 우리 고향집은 수용소에 자리를 내주고 ‘삼거리’라는 산골로 피난을 가게 된 역사를 안고 있다. 전쟁으로 이북에서 남쪽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부산에 정착하다가 휴전협정으로 다시 이북으로 간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 흩어져 지금까지 살고 있듯이 우리도 피난민 중 하나다. 한민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운 전쟁은 엄청난 피해를 남기고 타의에 의해 중단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정전 협정으로 휴전선이 그어지고, 남북은 지금까지 세계역사의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로 있다. 폭격으로 집과 공장, 도로와 다리, 철도 등이 부서지거나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다. 아무 죄가 없는 수많은 국민, 그리고 전쟁에 참여한 군인과 외국인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고, 또 피란 길에서 가족이 남과 북으로, 이 지역 저 지역으로 뿔뿔이 헤어졌으며, 많은 아이가 부모를 잃고 오갈 곳이 없어졌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큰 상처는 남과 북의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고, 같은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전쟁 중에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때는 북한의 편을, 또 어떤 때는 남한의 편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전쟁 기간 동안 피란을 가서도 아이들은 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에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천막을 쳐놓은 임시 학교였는데, 천막조차 없이 전봇대에 칠판만 걸어 둔 곳도 있었다. 지붕이 없으니 비라도 내리는 날엔 수업을 할 수 없었다. 책상도 없었지만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의 수업을 열심히 들었어요. 그래도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그나마 행복한 편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면, 포로들 때문에 고생한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다. 1951년부터 3년 가까이 고향을 버리고 타향살이를 하면서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형편인지라, 수용소 자리 외에 남은 토지를 찾기가 어려웠다. 낮에는 10키로 정도 되는 고향으로  와서 농사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돌아가고 하기를 3년이나 한 것이다. 가을이 되어 추수를 해서 벼(나락)를 가마니에 넣어서 지고 산을 넘어가야 하는데 그 고개가 얼마나 험한지 죽을 고생을 했다고 한다. 포로 수용소가 남기고 간 자리를 다시 개간하여 옥토를 만들었고, 그 농사로 나와 우리 6남매는 공부도 하고 오늘의 부강한 나라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의 아픔을 아는 부모님들은 점점 늙고 병들어가고 이 세상을 떠나는 분들이 많다. 이러한 오늘 이 시대에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는 불순한 세력들이 판을 치는 꼴을 보면서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사람은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고,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자각의 마음을 가져 감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고, 오늘을 발판으로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 71주년을 맞이하는 6.25의 그날을 잊지 말고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 변화해 가는 시대에  부응하는 국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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