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집/특별기고

6월, 우리가 기억하고 기도해야 할 것들

 

  우리는 해마다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부르면서 온 국민들이 나라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달로 보내고 있습니다. 6월이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난 달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그 6.25전쟁 7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옛말에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사마양저라는 제나라의 장군은 “나라가 크다고 할지라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하가 비록 평안하다 하여 전쟁을 잊어버리면 반드시 위기가 올 것입니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든 전쟁을 피해야 하는 이유는 전쟁의 참혹성 때문입니다. 6.25전쟁도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남북한을 합하여 400만 명이나 목숨을 잃었고 우리 대한민국 국민 163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전쟁고아가 6만 명이 발생했으며 전쟁에서 가정이 깨어지고 남편을 잃은 부인이 50만이었습니다. 우리 국군과 유엔군을 합해서 77만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일천만 명을 이산가족으로 만들었습니다. 국토의 80%가 초토화되었습니다. 이처럼 참혹한 결과를 남겼기에 기억하기도 싫은 전쟁이 6.25전쟁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참혹한 6.25전쟁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점점 사라지면서 이 전쟁이 빠르게 우리의 기억 속에 사라지고 있습니다. 6.25를 경험한 세대는 이제 우리 국민 중에 8%가 채 되지 않습니다. 국민의 92%가 전쟁을 모르는 세대입니다. 몇 해 전 언론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6.25전쟁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더니 상당수가 이 전쟁이 남침 전쟁(북한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미 잊혀진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 전쟁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6.25전쟁이 “유도된 남침 전쟁”이라는 논리는 시카고대학 교수였던, 부르스 커밍스 박사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책은 80년대 대학가의 필독서였습니다. 미국이 기획해서 한국이 시작하고 북한을 끌어들인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북한의 침공, 방어선의 즉각적인 후퇴, 낙동강 전선의 유지, 그리고 인천상륙작전까지 미국의 전쟁계획에 포함이 되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1994년에 단번에 무너졌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옐친러시아 대통령과 한러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서 모스크바에 갔을 때 옐친대통령이 한국과 관련된 약 300여 점의 비밀문서들을 넘겨줍니다. 거기에는 1949년 1월부터 1953년 8월까지 한국전쟁 1년 전부터 한국전쟁이 끝나고 1개월이 지난 시점까지의 북한과 소련 사이에 오고 갔던 외교전문들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김일성의 남침계획과 스탈린이 승인한 사인이 모두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한 고 김영삼 대통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일각에서 주장해온 6.25 북침설(대한민국이 일으킨 전쟁)이 이 문서로 인해 완벽한 허구임이 명백히 드러났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1990년대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구소련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당시 러시아가 경제적인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그들이 우리와 외교를 맺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우리와 외교를 맺기 위하여 6.25는 북한과 소련이 함께 만들어낸 전쟁이라는 것을 양심선언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10년 6월 18일 MBC 보도에 의하면, 중국 환구시보 영문판에서 냉전 시대 국제사 전문가인 중국 화동사범대 선즈화교수는 “미국과의 관계악화를 막기 위해 김일성의 지속적인 남침승인요청을 거부해오던 스탈린은 1950년 1월 말에 돌연 마음을 바꿨고 그해 4월에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서 남침계획을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북한 정권에 우호적인 세력이 중국입니다. 그 중국의 공산당의 기관지와 같은 매체에 올린 글이 이렇게 밝히고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6.25가 북한의 남침 전쟁이라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6.25는 북한의 침략전쟁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지금 휴전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현장에 있습니다.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 누가 일으켰는지 이 분명한 역사를 우리의 다음 세대가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살아있어도 죽은 민족입니다. 우리의 성공은 신기루에 불과할 가능성이 큽니다.

 

  또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국군만 13만7899명이 목숨을 잃었고 32,838명이 포로 또는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또 3000여 명의 학도병이 군번 없는 군인이 되어 포화 속으로 달려 나가서 조국을 지켰습니다. 6.25전쟁 최후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에서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 다부동(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이었습니다. 당시 29살의 나이로 육군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50년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7차례 격전을 벌였습니다. 다부동전투에서만 우리 육군 2,300명이 전사하고 미군 1,282명이 전사했습니다. 북한군은 5,690명이 죽었습니다. 그는 이 전선을 지키면서 도저히 먹지도 못하고 지칠 대로 지친 장병들을 데리고 전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백선엽 장군은 사단장이 직접 최선봉에 서서 “내가 앞장선다. 너희들은 나를 따라라. 만약 내가 한 발짝이라도 물러서면 너희는 나를 쏘아라.”하면서 사단장이 선두에서는 전사에 유례가 없는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의 희생과 지휘관들의 투혼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우방국의 희생과 도움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쟁기념관 자료에 보면, 미군 36,940명이 전사했습니다. 근데 워싱턴 메모리얼에 가면 55,000명이 전사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걸프전쟁당시 이라크에서 미군 4,300명이 전사했습니다. 그 8배입니다. 6.25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벤플리트 사령관의 아들도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북한군지역에서 추락, 실종된 것입니다. 두 번의 수색팀을 파견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때 벤플리트 장군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벤플리트 중위를 살리기 위해서 더 이상 아군을 희생할 수 없다. 수색작전은 여기서 종료한다!” 밴플리트 장군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세우는 일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뒤 한국전 참전용사 묘역에 이런 비문이 있습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조국의 부름에 응답하며 나아간 미국의 아들과 딸들에게 우리의 조국은 경의를 표한다.”(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 never met) 전쟁 3년 동안 약 1789만 명의 미군들이 참전했습니다. (8군 예하 3개 군단 8개 사단, 1개 해병 사단, 2개 연대 전투단, 해군 7함대, 공군 20개 비행단, 77개 비행대대) 부상자가 9만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 입니다. (자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6.25전쟁통계) 이런 엄청난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혈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한국교회의 피해와 눈물의 기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수많은 교회당이 파손되었습니다. 연세대학교 민경배 교수의 한국교회사를 보면 일제 시대에 순교 당한 신자의 숫자보다 6.25전쟁 때에 북한군에 의해서 학살당하고 순교한 성도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 김익두 목사, 남궁혁 목사, 조만식 장로 등 장로교가 177명, 감리교가 44명, 성결교가 11명의 지도자를 잃었습니다. 집단으로 학살당한 교회를 예로 들면 충남 병천교회는 66명의 성도가, 전남 영광의 염산교회는 77명의 성도가 야월교회는 65명의 성도가 전북 원당교회는 73명의 성도가 순교했습니다. 완파된 예배당은 장로교가 152개, 감리교가 84개, 성결교가 27개, 구세군이 4개였습니다. 부분 파괴된 예배당까지 합하면 전국에 1000여 개의 예배당이 무너지고 파손이 되었습니다.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던 평양을 비롯한 이북의 2,000여 교회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가장 싫어합니다. 그들의 정신기초인 유물론을 무력화시키는 힘이 기독교의 성경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쟁 속에서 한국교회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전선(戰線)이 낙동강까지 밀리고 온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부산 땅까지 피난 내려간 한국교회 성도들이 부산역 근처 초량교회와 용두산 밑에 있는 부산중앙교회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분들을 찾아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이런 부탁을 합니다. “여러분 기도해주십시오. 지금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고 내려온 북한군을 막아내고 전세를 역전시키려면 강력한 제공권을 가진 미 공군 전폭기의 도움이 필요한데 비가 내려서 전투기가 뜰 수가 없습니다. 전투기가 떠야 낙동강 방어선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비가 그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성도들은 교파를 초월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낙동강 전선을 지켜주셨고, 서쪽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915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였으며, 918서울 수복이 이루어졌고, 동쪽에서는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던 육군 3사단에 의해서 동부전선 38선 돌파(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가 이루어진 날이 10월 1일입니다. 이날이 국군의 날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이루어진 것일까요? 한국교회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기도는 우리나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일에 늘 함께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님은 이 나라와 교회를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6월에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복음이고 교회입니다. 그 이유를 6.25전쟁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6.25전쟁은 한반도를 절망의 땅으로 만든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땅 젊은이들의 희생과 우방국의 헌신과 함께 교회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을 때 이 땅이 다시 회복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 개입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유물 사상 뿐 아니라 우리 시대를 망가트리고 있는 쾌락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같은 또 다른 유물사관의 잔재들과 우상들을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와 이 땅의 다음 세대들이 넉넉히 이겨내게 해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차가운 동토의 땅, 사랑하는 북녘 동포들의 눈물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 펜더믹으로 모든 것이 막혀있지만 하늘로 열린 창은 어저께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음을 기억하고 6월 한 달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한 달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