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예배”라는 말 자체는
부모가 예배의 대상이 되기에 유의
추도예식은 한국인의 독특한 내세관과
효(孝)사상에서 근거
새로운 형태의 가족 공동체 회복의 기회로
다종교 사회인 우리나라는 중동이나 일부 유럽 국가에서와 같이 극단적인 종교적 갈등은 없다. 그렇지만 부자간, 형제와 친족간에 조상 제사에 대한 의례를 놓고 여러 갈등과 고민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가족 중에서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이질적인 종교를 가진 경우에는 이러한 문제는 필연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부모님의 기일에 거행해 왔던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금지시키고 그 대신 추모예배라는 제도를 권장했다. 그러나 추모예배가 이름과 방법만 바꾸었을 뿐 의식구조는 부모님께 제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드리는 경향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표준예식서』에 의하면 추도예식은 “고인의 믿음의 발자취를 더듬고 그의 유지를 회상하는 가운데 큰 교훈을 받고 새로운 결심이 유족에게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유족과 친족 및 친지들 간에 화목과 우의를 더 깊게 갖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표준예식서』의 제7장 6절 추모예식의 지침에는 추모예식은 ‘고인을 기념하여 애도하고 추모하는 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추도식’(追悼式)이라는 명칭에서 ‘도’(悼)는 ‘슬퍼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추도식의 개념이 기도나 예배에 적당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만약 추도식을 사용한다면 ‘기도하다’의 의미에서 ‘도’(禱)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추모식’(追慕式)은 ‘이미 소천하신 분들과 그들의 삶을 기억하며 기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추도식과 비교할 때 조상이 돌아가신 날에 후손들이 모여서 고인의 삶을 회고하며 신앙의 삶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통합측과 합동측에서는 ‘추모예식’, ‘추모예배’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기장측과 성결, 감리교에서는 ‘추도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어쨌든 추도예배라는 말 자체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 이유는 자칫 잘못하면 부모가 예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다. 그리고 그 예배의 방법도 십계명의 둘째 계명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그 방법으로만 드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라는 유교적 문화에서 돌아가신 부모에 대해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심각한 불효자로 여겨졌기에 한국교회는 추모예배라는 독특한 한국교회만의 제도를 정착시켜 왔다.
그런데 한국인의 오랜 내세관 내지 사생관과 효도의식에서 추도예배의 유래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내세관은 독특했다. 한국인의 의식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람 속에 있던 넋(영혼)은 저승 같은 곳에 곧바로 가지 않고 이승(이 세상)이나 그와 가까운 사람들 곁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심장이 멎으면 완벽하게 없어지는 것도, 떠나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그 넋(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 마치 석양의 붉은 빛처럼 윤곽도 없이 존재하다가 어느 만큼의 세월이 지나면 일반 혼령 가운데 용해되어 버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죽은 후 얼마 동안은 그 넋을 현세에 머무르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또한 현세에 머물도록 하지 않으면 화를 당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이 죽은 후에 시체는 흙 속에 묻으나 넋은 신주로 삼아 죽은 후에 일정한 기간 제청(祭廳)을 만들어 집 식구들과 함께 먹고 같이 잔다. 그리고 그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사당으로 신주를 옮겨 놓고 집을 출입할 때마다 사당에 고해야 하고,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사당의 영혼에게 고해야 한다. 또한 맛있는 음식이 생기거나 특별한 절기가 되면 먼저 그 음식을 죽은 넋에게 바친 후에야 먹도록 되어 있다. 사당에 모시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기일(忌日)에 불려 제사를 지내고 명절마다 차례(茶禮)를 지내고 성묘도 가야 한다. 특히 기제사를 드릴 때 자손들은 목욕재계를 하며 기다렸고, 혼령이 활동하는 시간대인 새벽닭이 울기 전인 새벽 1시쁨에 문도 열어놓고 지냈다. 그리고 혼령이 식사하는 순서에서는 모두가 물러나와 10여분간 서 있다가 기침소리를 하고서야 다시 제사 현장에 들어갔다. 이처럼 한국의 내세관은 죽음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어정쩡한 사생관에서 기일제사가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생관 내지 내세관은 성경에서는 용인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그 사람의 신앙에 따라 바로 천국과 지옥으로 가고, 죽은 영혼은 부활할 때까지 지상에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교회는 기일제사가 무상적 행위가 된다고 하여 추도예배로 바꾸게 된 것이다.
추도예배의 또 다른 하나의 근거는 효(孝) 사상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 조상들은 인간의 가치를 효에 두었다. 그 효도의 크기에 따라 명예가 주어졌으며, 심지어 효도에 따라 조세부담도 가감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효행풍습을 살아계신 때보다 죽어서 더 했다. 친상 때에는 무덤에 이슬이나 비를 가리는 초려(草廬)를 짓고 3년 동안 묘를 지키는 일이 보편화 되었다. 그리고 친상 때에는 관직도 버리고 먹고 싶은 음식도 안 먹고, 입고 싶은 옷도 안 입고, 농삿일도 안 하고, 심지어 집에 불이 나도 달려가지 않았다. 즉, 먹고 입는 것보다 가산이나 가족보다 부모의 무덤을 더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3년 동안은 고기와 술, 담배를 피했고, 3년 상중에 아이를 낳으면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3년 동안은 죄인이라는 의식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땅만 내려다보고 다녔고, 베옷 차림으로 허리띠를 풀지 않고 살아야 했다. 이렇게 체질화된 효행풍습은 부모님이나 조상들의 기일이 되면 그 날에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여야 돌아가신 분에게 효도한다고 생각하여 장손의 경우 연중 거의 계속되는 조상에게 대한 제삿일로 시달리고 가산을 탕진하게 되는 폐습을 낳기까지 했다.
이런 낡은 폐습이 기독교와 함께 들어온 서구 문명의 물결에 밀려 극단적 효도 행위는 사라졌으나 아직도 부모님의 넋을 위로하고 대접하므로 효도할 수 있다는 뿌리 깊은 의식은 한국인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런 의식 때문에 부모님 또는 조상의 기일은 그대로 지나갈 수 없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조상의 기일 제사를 추모예배로 대신하는 제도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교에서 기일에 갖는 제사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먼저 세상을 떠나가신 부모님을 기억하면서 살아계신 부모님과 웃어른을 더욱 공경하고 잘 섬기겠다는 다짐을 하는 시간이다. 사실 공자의 논어에 보면 사람이 죽은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람됨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유교에서도 제사의례가 죽은 영혼이 찾아와 절을 받거나 음식을 먹는다고도 보지 않는다. 따라서 돌아가신 후에 아무리 제사를 잘 지낸다고 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이다. 살아계실 때 지극정성으로 모셔야 한다. 이 사실을 기제사 때 돌아가신 부모님 앞에서 모두가 다짐을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훈을 생각하고 형제들 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면서 가족 공동체의 유대감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피치 못할 일이 있을 때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에는 고향에 가지 못해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기일에는 반드시 가야만 했다. 기일에 가지 않으면 불효막심한 사람으로 비난을 면치 못했다. 따라서 8남매, 9남매로 가족이 아무리 많아도,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반드시 다 모였던 날이 기일이었다. 따라서 기일에 흩어졌던 온 가족들이 모여서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훈들을 나누면서 형제간의 우애와 유대감을 회복했었다.
이와 같이 제사가 갖는 의미를 추모예배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 즉, 추도예배는 단순한 옛날 우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형식을 기독교적인 옷만 입힌 관습적인 의식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서의 가족 공동체를 회복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계신 부모님과 웃어른을 공경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면서 핵가족으로 무너져가는 가족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다. 한국 전통의 조상의례에 대한 개신교의 토착화와 의례의 예배화로 정착된 것이 추모예배다. 중요한 것은 조상의례는 부모에 대한 공경과 효라는 윤리적 규범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올바른 추모예배에 대한 신앙적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적 내세관의 확립과 둘째로, 구원과 심판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 기준, 셋째로 추도예배의 올바른 의의 등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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