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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행복한 세상 만들기

“오늘도 삼위 하나님 이름으로 사랑의 집을 지어 이웃에게 나눕니다.”

   서일권 장로, 언제 어디서나 주의 사랑을 흘러 보내다.      

  소리가 큰 시대, 그러나 생명은 조용히 산다

  세상은 늘 큰 소리를 먼저 알아본다. 얼마나 빠른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얼마나 눈에 띄는지를 성공이라 부른다. 빛은 간판 위에서 깜빡이고, 사람들은 그 아래서 박수를 친다. 말이 크면 진실도 크다고 믿고, 속도가 빠르면 삶도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앞서 달리는 동안 우리는 자주 놓친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대개 소리가 없다는 사실을.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환호도, 기록도 없다. 뉴스의 자막으로 남지 않고, 표어로 인쇄되지도 않는다. 그 일은 늘 아무도 묻지 않는 시간에 시작되어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그런 선택 하나가 한 사람의 하루를 붙들고, 한 공동체의 내일을 다시 연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언제나 그렇게 낮은 곳에서, 조용히 시작되어 왔다. 

  어디에 서 있었는가로 남는 신앙

  부산 영도, 바람이 먼저 말을 걸고 파도가 하루의 속도를 가르쳐 주는 그 땅에서 서일권 장로(제5 영도교회 시무장로, 전 고신총회 부총회장)는 오늘도 말없이 하루를 건넌다. 그는 장로이고, 건축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설명하는 데 직함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의 신앙은 늘 어디에 서 있었는가로 남기 때문이다. 그는 앞에 서는 사람이라기보다 곁에 서는 사람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보다 사람들 옆에서 버티는 쪽을 택한다. 필요한 자리를 먼저 보고, 드러나는 자리는 한발 물러선다. 

   말보다 먼저 움직인 기도 

  그는 묻지 않는다. “누가 요청했는가”를. 대신 살핀다. “지금 누가 무너져 있는가”를. 그리고 가장 먼저 그 자리에 선다. 먼저 발이 움직이고, 설명보다 먼저 손이 닿는다. 그에게 신앙은 입으로 고백 되는 문장이 아니라 이미 몸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다. 그 방향은 언제나 사람 쪽이었고, 언제나 예배가 다시 시작되어야 할 자리였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 예배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도, 화재가 모든 것을 삼켜버린 교회 앞에서도 그는 한참을 서 있었다. 예배당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갈 곳을 잃었다. 찬송이 멈춘 자리는 생각보다 깊고 차가웠다. 그 앞에서 그는 쉽게 위로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말보다 먼저 다시 세울 수 있는지를 헤아렸다. 

  그가 시작한 것은 건축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배를 회복하는 일이었고, 사람의 중심을 다시 하나님 쪽으로 돌려놓는 일이었다. 무너진 벽 위에 철근을 얹고, 그 위에 다시 시간을 올렸다. 콘크리트가 굳어갈수록 흩어졌던 기도가 모였고, 눈물은 서서히 자리를 찾았다. 전소되었던 합산교회 자리에는 이전보다 더 넓고, 더 단단한 예배당이 서서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날 사람들은 알았다. 이 집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화재를 딛고 다시 세운 합산교회_서일권 장로 감사패

   이름 없이 남긴 집, 그리고 조용한 섬김

  그의 손길은 언제나 드러나는 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병원 문턱조차 부담이 되는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조용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열여섯 명. 결정은 느렸지만 흔들림은 없었다. 그가 더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었다.

  부담되지 않게, 미안해하지 않게, 감사조차 하지 않아도 되게. 그래서 그의 섬김에는 늘 이름이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진짜 사랑은 상대에게 빚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또 다른 집을 짓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집, 사람 안에 세워지는 집이었다. 고신장학회를 통해 신학생들을 돕는 일은 그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교회를 세우는 일과 사람을 세우는 일은 그에게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지으신 집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다음 현장으로 향한다. 공로는 하나님께 있고, 자신은 그저 통로라는 고백은 그의 삶에 이미 굳은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눈물로 끝나지 않는다. 대신 질문으로 남는다. 

  우리는 오늘 어디에 서 있었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누구의 곁에 남았는가를 우리의 신앙은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는 조용히 뒤집힌다.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그가 집을 지었다고. 그러나 신앙의 깊은 곳에서 다른 진실이 고개를 든다. 그가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집을 지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큰 언어로 일하지 않으신다

  그는 간판 위의 조명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켜진 불씨로 살아간다. 병원 대기실의 숨죽인 기도 속에서, 낡은 예배당의 첫 찬송 속에서, 그리고 다시 예배할 수 있게 된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빛난다. 하나님은 오늘도 큰 언어로 일하지 않으신다. 대신 한 사람의 작은 순종을 통해 집을 짓고 계신다.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집, 다시 기도할 수 있는 집, 사랑이 쉬어 갈 수 있는 집을. 

  서일권 장로의 삶은 그 사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말없이 증언한다. 삼위 하나님 사랑의 집은 우리가 지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 자리에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세우고 계셨다는 것을.

  이 글의 끝에서 우리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잠시 걸음을 멈추고, 깊은 묵상에 들어간다. 우리는 그가 사랑의 집을 짓고 나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먼저 그 집에서 우리를 세우고 계셨다. 그래서 이제 결심하게 된다. 

  오늘, 나는 어느 자리에 서서 누구를 드러내며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