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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내 안에 쌓이는 것들을 해결하라”(롬2:5~6)

  쥐 마을에서 현명한 어른 쥐가 죽기 전에 후배 쥐들을 모아놓고 가장 경계해야 할 것에 대해 유언을 하는데 “고양이도 나이 들면 그저 같이 늙어가는 이웃일 수 있고, 쥐덫도 그 나이가 되면 분간할 줄 알지만, 쥐약은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무서움을 다채롭게 위장한 쥐약, 전혀 쥐약처럼 보이지 않는 쥐약, 먹으면 뿌듯하고 행복할 것 같은 쥐약, 그놈의 쥐약은 나이 들어 죽을 때가 되어도 가장 치명적인 적이다.”라고 하고 했다.

   사탄은 화려한 쥐약처럼 우리를 유혹한다.

  사탄이 만약,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입에 칼을 물고 피를 뚝뚝 흘리며 서 있다면 사람들은 한눈에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전혀 사탄스럽지 않게 우리에게 접근한다. 마치 빛나는 쥐약처럼 멋지게 보이며 다가와 우리를 파괴하려 한다. 쥐약의 문제는 쥐약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한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무엇인가?   

  죄를 죄같이 보이게 하지 않는 유혹이다. 절대 기준을 없애버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현대인들은 성경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다른 용어를 만들어 내었다. 즉, 죄라는 소리가 싫어 여러 가지 심리학적 사회학적 용어를 사용했다. 죄를 죄같이 여기지 말라는 유혹이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 박사는 죄라는 단어는 물론 그 개념까지 사라지고 있는 현대 사회를 경고했다. ‘죄’는 그동안 인간 삶의 중심 잣대 역할을 하는 강하고 무거운 단어였는데 이제 사람들은 죄에 대한 언급을 거의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 아무도 죄를 짓지 않아서 죄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주홍빛 같은 죄가 지금도 넘쳐난다. 그런데 죄라는 단어가 세속화된 사회에서 사라져가고, 그 결과로 죄나 악과 같은 도덕적, 신학적 용어는 범죄(crime)나 증상(symtom), 질병(illness) 같은 사회 심리학적 용어로 대체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죄’는 당연히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질병이라고 하면 책임의 여부가 없어진다. 메닝거 박사는 죄를 인정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의 정신적, 도덕적 회복의 시작점이라고 본다.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시인이자 동화 작가인 필리스 맥긴리도 “죄를 질환으로 보는 것은 악마의 가장 잔인한 최신 무기다.”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말 그대로 죄인 것이지 증상이나 질병이 아니다. 죄는 죄다. 죄에 대한 거부는 하나님에 대한 거부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한다.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무조건 회개해야 한다! 회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슈브’이고, 헬라어는 ‘메타노이아’다.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뜻한다. 가룟 유다는 죄를 짓고, 망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아서 망했다는 말이 있다. 출애굽 당시 애굽 왕 바로가 빨리 회개하였으면 10가지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서도 엉뚱한 해석을 하면 안 된다. 알콜 중독자는 “나는 알콜 중독자입니다”라는 고백을 시작으로 치유가 시작되고, “죄를 지어서 죄송합니다”라는 고백으로부터 죄의 치유가 시작된다. 우리는 모두 눈이 밝아져 ‘남의 죄’를 잘 본다. 그러나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한다. 최고의 저주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사울과 다윗의 큰 차이가 있다. 둘 다 죄인이다. 문제는 회개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죄의 자백 없는 사울은 망했다. 다윗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함으로 다시 일어서게 된다. 더 크게 쓰임 받게 된다. 이것이 영적 원리다. 

  우리는 무엇을 이루거나 기막힌 것을 얻었을 때 “앗싸”라고 외친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신이 나서 외치는 외침은 ‘앗싸!’보다는 ‘홀가분하다’라는 것이다. 정말 힘들고 거추장스럽고, 불편했던 것을 떨쳐냈을 때의 외침 ‘홀가분하다’ 이것이 가장 신나는 말이다. 

  다윗이 그랬다.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 기나긴 광야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왕이 되었을 때, 나라를 크게 넓혔을 때. 아마 “앗싸” 하고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가장 행복했을 때는 그때가 아니라 자신의 주홍빛 같은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아 눈같이 희어졌을 때였다. 바로 죄를 씻고 홀가분할 때였다. 시편 32편이 바로 그 홀가분한 마음의 외침이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2) 

 

  다윗의 가장 큰 기쁨은 죄 사함을 받은 기쁨이었다. 우리 인간의 가장 큰 기쁨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 사함을 받는 기쁨이다. 그리고 우리의 수많은 죄악을 회개하여 용서받을 때다.   

  앗싸~~~~ 보다 홀가분함이다.

박연식 목사(울산수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