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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선교와 전도

대영박물관 관람기(15) “돌에 새긴 교만, 심판을 예고하다.”

  런던 대영박물관에 들어서면 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증언하는 유물들의 향연에 압도당한다. 그중에서도 앗시리아 전시관은 고대 근동을 철권으로 통치했던 한 제국의 흥망성쇠를 돌에 새겨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특히 7전시실과 10a 전시실은 약 20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제국의 힘과 예술,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교만의 변화를 극적으로 대비시키며 오늘날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7전시실의 문턱을 넘으면 우리는 기원전 9세기, 신(新)앗시리아 제국의 기틀을 다진 앗슈르나시르팔 2세의 시대로 들어선다. 

“앗슈르나시르팔 2세  석판 부조”_서진교 목사 제공

  그의 수도였던 님루드(Nimrud) 궁전 벽을 장식했던 석판 부조들은 한마디로 ‘힘의 과시’ 그 자체다. 정복지의 성벽을 무너뜨리는 공성 무기와 무자비한 정복 활동,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전리품은 제국의 군사적 위용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이국적인 원숭이를 공물로 바치는 사절단의 모습이 새겨진 부조는 제국의 영향력이 얼마나 광대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원숭이 공물을 받는 앗슈르나시르팔2세_ 대영박물관 안내책자 제공

  그중에서도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단연 앗수르 군대가 강을 건너는 장면이다. 병사들은 동물의 가죽에 공기를 불어넣은 튜브(부낭)를 옆구리에 끼고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거친 물살을 자유자재로 가로지른다. 이는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륙양면의 작전 능력을 갖춘 정예부대를 양성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마치 현대의 해병대처럼, 그 어떤 지형지물도 앗수르 군대의 진격을 막을 수 없다는 자신감이 부조 전체에 넘쳐흐른다. 병사들의 머리 위로는 날개 달린 신들이 날아다니며 그들의 정복 전쟁을 비호하고, 독수리는 신의 대리인이 되어 군대의 선봉에 서서 승리를 보장하는 듯하다. 이처럼 신들의 가호 아래 행해지는 정복은 거룩한 사명으로 포장되었다.

“호전적인 앗시리아 군대와 강을 건너는 장면_서진교 목사 제공

  이 시대의 ‘사자 사냥’ 부조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은 위풍당당하게 전차 위에 서서 의식의 일부인 양 활시위를 당긴다. 

“앗슈르나시르팔 2세의 사자 사냥 장면 _서진교 목사 제공

  사자는 왕의 절대 권력 앞에 힘없이 쓰러져야 하는 상징적인 존재일 뿐, 장면 자체는 정형화되고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 이는 왕이 자연계의 왕인 사자마저 지배하는 질서의 수호자임을 선포하는 정치적 선전물에 가깝다.

  그로부터 200년의 세월이 흐른 기원전 7세기,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아슈르바니팔의 시대에 이르면 앗시리아 예술은 그 정점에 도달한다. 10a 전시실을 가득 채운 ‘사자 사냥’ 연작 부조는 인류 미술사상 가장 뛰어난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7전시실의 정형화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숨 막히는 리얼리즘이 석판 위에서 펼쳐진다.

(사진6)“앗슈르바니팔의 사자 사냥 장면 _서진교 목사 제공

  이곳의 사자들은 더 이상 상징적인 제물이 아니다. 왕의 창에 찔려 피를 토하며 절규하고, 척추가 부러진 채 앞발만으로 처절하게 몸을 일으키려는 암사자의 고통이 돌의 표면을 뚫고 나올 듯 생생하다. 격노하여 전차로 뛰어드는 사자의 역동적인 근육과 갈기, 죽음의 순간에 경련하는 발톱의 미세한 떨림까지 묘사한 장인의 솜씨는 경탄을 자아낸다. 이는 단순히 예술적 기교의 발전을 넘어, 폭력과 정복의 미학이 극단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우리에서 풀려난 사자들이 왕의 무자비한 힘 앞에 쓰러지는 과정을 한 편의 서사시처럼 구성한 이 공간에서, 관람객은 앗시리아가 도달한 힘의 절정과 그 이면에 감춰진 잔혹성에 동시에 전율하게 된다.   

“사자 사냥 장면”_서진교 목사 제공

  성경은 이처럼 호전적이고 잔인했던 앗시리아를 어떻게 평가할까? 성경은 앗시리아를 ‘힘센 사냥꾼’ 니므롯의 후예로 본다. 동물의 왕 사자를 장난감처럼 사냥하며 절대 권력을 과시했던 그들의 모습은 나훔 선지자의 예언 속에서 아이러니하게 심판의 상징으로 뒤바뀐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Nineveh)의 멸망을 예언한 나훔은 바로 그 ‘사자’의 이미지를 빌려와 심판을 선포한다.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나훔 2:11-13)

  스스로를 포식자인 사자에 비유하며 영원할 것 같던 힘을 과시했던 앗시리아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사냥당한 사자처럼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서늘한 경고다.

  예수께서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리라” (마태복음 26:52)고 하신 말씀처럼, 폭력으로 쌓아 올린 제국은 더 큰 폭력 앞에 무너지는 것이 역사의 순리다. 맨손으로 사자를 찢었던 삼손조차 교만했을 때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다. 앗시리아가 돌에 새겨 자랑했던 교만한 용맹과 잔혹함은 영원하지 않았다. 대영박물관의 차가운 석판들은 침묵으로 증언한다. 인간의 힘과 예술이 아무리 절정에 달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일 뿐임을. 진정한 평화와 영원한 통치는 제국의 칼끝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 앞에 겸손히 엎드릴 때 비로소 임하는 법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