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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비와 기쁨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신11:14)

   저를 아끼시는 형님께.

  입추와 말복이 지나면서 날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는데 놀리는 것마냥 다시 더워지고 있습니다. 달력을 안 보고도 날씨가 변하는 걸 느끼면서 절기를 맞추시던 어머니가 지금 생존해 계신다면 이게 무슨 변고인가 하실 것 같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기상 속에서도 형님은 이곳을 떠나기 전에 그랬듯이 여전히 활기찬 삶을 살고 계시겠지요? 

  어느 분이 ‘글쓰기는 누에가 뽕잎을 먹고 고치를 짓고 들어앉으면 나중에 명주실이 풀려나오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전문적인 이야기는 수십년간 축적된 지식과 최근에 저의 레이다에 걸려든 정보를 재료로 어찌어찌 써집니다. 하지만 나의 내면을 살피는 일은 정말로 분만하는 여인의 고통과 같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쩌다 보니 저는 요즘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 이곳저곳에 글을 써 보낼 일이 생겨 뜻하지 않은 정리와 창작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8월 21일 마감하기로 약속한 글이 써지지 않아서 꽤나 드물어진 머리카락 쥐어뜯다가 형님 생각이 나서 편지를 씁니다.

  우정을 생각하면 천하의 악필일지라도 손 편지로 보내고 싶지만, 군 생활 이후 손에 익은 컴퓨터 자판으로 타자를 칩니다. 정성 없다고 타박하지 마시고, 아우가 형님의 노안을 생각하여 그러는 것이라 귀엽게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1993년 7월 17일, 제헌절 공휴일에 장가를 들었습니다. 결혼식은 전주이씨 종친회관에서 열렸고, 그 앞 ‘비원(秘苑)’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지금은 창덕궁 후원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그날은 비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졌습니다. 등줄기에 땀은 흐르고, 새로 뽑아 입은 양복은 금세 젖어버렸습니다. 다리 부상으로 오시지 못한 장모님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훔치던 장인어른의 모습도 선합니다. 주례를 맡으신 박세흥 목사님은 독일 광부로 가셨다가 캐나다에서 신학을 공부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날 저는 주례사는 짧을수록 좋다는 것을 확실히 배웠습니다.

  1995년 8월 10일, 아들이 태어나던 날에도 비가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 그 아이의 돌잔치 날에도 큰비가 내렸습니다. 돌아보면 제 인생의 소중한 순간마다 늘 비가 함께했습니다.

  제 이름은 한우(韓雨). 나라 한(韓)에 비 우(雨), 곧 큰 비라는 뜻입니다. 2010년부터 2년간 북경에 살고 있을 때 제 명함을 받아 든 중국인들은 제 이름의 중국어 발음과 뜻이 모두 무척 낭만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저 그런가 생각했고, 기분이 나쁘지는 않더군요. 그러고는 잊고 살았죠. 그런데 오늘 그 일이 새록새록 저의 기억 속으로 돌아오면서 성경에 나오는 이른 비와 늦은 비 이야기와 겹치며 저의 인생 언덕 너머에 손바닥 만한 구름으로 떠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저는 지난해 말부터 참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정치학박사 논문은 여러 번 새로 쓰다시피 하면서 지도교수님께 눈물 쏙 빠지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아내는 불면증에 시달렸고, 아들은 인생의 방향을 잡으려는 노력과 하나님에 대한 실망으로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죠. 삼각파도 속에서 너무 힘들고 기가 막혀서 숙소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내려주시는 단비처럼, 제 인생에도 꼭 필요한 순간마다 은혜의 비가 내리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제 이름으로 지어주신 큰 비. 장가 가던 날 내렸던 큰 비, 아들의 탄생 날 내렸던 큰 비, 그 아들의 돌잔치 날 쏟아진 큰 비는 모두가 쏟아붓듯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예고였다고 해석이 되었습니다. 저의 삶에서 젖은 양복과 젖은 어깨 뒤에는 하나님의 큰 손이 함께 있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제 삶에 내려주실 시의적절한 은혜의 비를 기다립니다. 

   형님, 비 오는 날이면 저를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주세요. 

  ‘한우가 이제는 목마른 사회와 삭막한 나라와 갈급한 사람들에게 단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선친께서 제 이름 속에 담아주신 의미를 붙들고, 남은 생애를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가겠습니다.        

이한우 올림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신11:14)

이한우 박사(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