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을 공부하다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사도행전 2장)에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로마에서 왔다는 것이 나오는데, 지리적으로 훨씬 가까운 고린도에서 왔다는 기록은 왜 없는가? 둘째, 유월절과 오순절은 50일 간격인데, 유월절을 지키러 왔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계속 머물러 오순절까지 지켰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사도행전 2장 9~11절에 언급된 지역들을 살펴보면, 각자의 고향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아 여러 지방, 그리고 로마에서 온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들을 지도에 표시해 보면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가장 먼 서쪽의 로마까지 매우 다양한 지역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레네의 경우,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헬라화 도시로서 유대인 공동체가 활발히 활동했다. 신약에서는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사람 시몬(마 27:32)이 등장한다. 본도의 경우, 본도 출신 유대인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으로 고린도로 이주했다가 바울과 만나 동역자가 되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 메대, 엘람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이후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후손이 정착한 곳으로, 구약의 바벨론 포로기와 귀환 사건에서 중요한 배경을 제공한다. 따라서 이 지역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루살렘과 로마의 중간 지점에 있던 고린도 출신 유대인에 대한 언급이 사도행전 2장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고린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950km로 로마(약 2,300km)보다 훨씬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없는 이유는 고린도 유대 공동체의 규모와 성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는 기원전 146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기원전 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 식민 도시로 재건되었다. 이후 로마 퇴역 군인들과 상인들이 대거 정착하면서 도시가 다시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유대인 공동체도 형성되었지만 규모는 대략 수천 명 수준에 불과했다. 이들의 활동은 상업에 집중되어 있었고,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 순례보다는 현지 정착과 생업이 우선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교통과 안전 문제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직선 거리상 고린도가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 항해 경로는 크레타와 키프로스(구브로)를 경유해야 했고, 고대 지중해 항해는 해적의 위협과 계절적 풍랑 때문에 상당히 위험했다. 특히 봄철(유월절 무렵)과 가을철(초막절 무렵)의 항해는 위험이 컸다.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이 “항해하기 어려운 시기”를 언급한 것도 이러한 배경을 반영한다.
반면, 로마 출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까지 장거리 순례를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 유대 공동체의 규모와 사회적 기반이 달랐기 때문이다.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는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해방된 노예, 상인, 장인, 금융업자, 행정관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1세기 중반에는 약 3~5만 명 규모로 성장했다. 여기에 헤롯 가문이 로마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대 귀족층 일부가 로마에 거주하거나 유학을 했고, 그들의 수행원과 학자, 시종들이 공동체의 사회적 기반을 강화했다. 이처럼 경제적·사회적 역량을 갖춘 로마 유대인들은 성전 순례를 신앙적 의무로 인식하며, 장거리 여행의 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다. 특히 로마에서 예루살렘까지의 항로는 주요 항구를 따라 비교적 안전하게 이어졌고, 제국의 수도라는 위상 덕분에 여행 보호가 용이했다.
그렇다면 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유월절보다는 오순절 성전 순례를 선호했을까? 유월절은 유대인의 가장 큰 절기였지만,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켜야 하는 절기는 아니었다. 많은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현지 회당에서 유월절을 기념했으며, 성전 제물 대신 가족 단위 식사(유월절 만찬)를 중심으로 절기를 지켰는데,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부담 때문이다. 유월절에는 어린 양 제물을 드리고 가족 단위의 절기 음식을 준비해야 했는데, 먼 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가족을 모두 데리고 예루살렘까지 이동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또한 교통과 기후 조건의 제약이 있었다. 유월절은 보통 태양력 3~4월경(니산월 14일)에 지켜졌는데, 이 시기는 지중해 항해가 막 시작되는 불안정한 계절로 폭풍과 파도가 잦았다.
반면 오순절은 유월절 후 50일, 곧 시반월 6일에 지켜졌으며, 밀 추수와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였다. 유월절처럼 가족 단위 준비가 필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이 순례하기에 부담이 적었다. 또한 5~6월은 날씨가 따뜻하고 항해 조건이 안정적이었으며, 지중해 무역과 교통이 활발해지는 시기였으므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오순절은 시내산 율법 수여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오순절은 민족적·종교적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절기였고, 성전을 방문하여 그 의미를 직접 체험하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신앙적 동기가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
초대교회의 땅끝까지 전도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오늘날 교회의 진짜 선교지이자 영적 전쟁터는 이념, 철학, 그리고 이단적 사상과의 전쟁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본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신흥 영성, 과학주의적 유물론 같은 세속 사상들이 이미 사람들의 사고 체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바벨론 포로, 페르시아의 고레스 칙령,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의 지배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셨는지를 보여준다. 성경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난 사실적 사건이다.
이런 부분에서 교회는 다음세대를 설득하고 변증하는 데 소홀하여, 젊은이들이 기독교는 ‘덜 지적이고,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며 떠나가지 않는가? 교회는 기독 학생/청년들이 기독교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기독교는 있는데 세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따라서 교회는 성경의 역사성을 확인(정리)하여 신앙과 함께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 속 사건들은 로마 제국의 법과 정치, 지중해 무역과 항해, 각 지역 공동체의 역사적 배경과 연결되어 검증 가능한 기록들이다. 그럴 때 다음세대는 신앙을 역사적 근거의 진리로 이해할 수 있으며, 오늘날 철학과 사상의 전쟁터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진리를 확신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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