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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선교와 전도

『자민족(자문화)중심주의와 복음2』

  그렇다면 성경이 보여주는 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전은 무엇인가?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 사회경제적, 신체적, 정치적 차이를 초월해서 복음 안에서 하나 된 한 몸 공동체이다. 동질 집단끼리가 아닌 이질집단으로 모이는 다인종, 다문화 교회다. 성경이 보여주는 몇 가지 그림들을 떠올려보자.

  첫 번째 그림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이다. 시날 평지에 모인 인류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스스로를 높였고, 그분의 명령에 불순종했다. 성경은 인류가 바벨탑을 쌓은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11:6) 결국 하나님이 내려오셨고, 그 결과 인류의 언어가 나누어졌다. 잘 보라. 인류의 언어와 민족이 최초로 나누어진 원인은 죄와 불순종이었다. 

이미지_크리스찬타임즈

  또 다른 그림은 사도행전 2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첫 번째 교회가 지상에 세워졌다. 시날 평지에 모인 인류와 달리, 오순절 다락방에 모인 또 다른 인류는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했다. 그들 가운데 성령 하나님이 내려오셨고, 그 결과 또다시 그들의 언어가 최소 15가지로 나누어졌다. 그 충격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11) 잘 보라. 비록 언어가 나누어졌지만, 초대교회는 동질그룹끼리 나누어져서 따로 예배하지 않았다. 나누어진 언어 그대로 함께 예배했다. 지상 첫 번째 교회는 언어적,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이었고, 다문화, 다언어 공동체였다.

  그러나 그런 언어적, 문화적, 사회경제적 다양성을 가진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여러 갈등과 불편함이 있었다. 사도행전 6장에는 그 한 예를 소개한다. 아람어를 구사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어를 모국어로 썼던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 과부들에 대한 구제 문제로 갈등이 일어났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언어와 문화에 따라 히브리파와 헬라파로 공동체를 둘로 나누지 않았다. 오히려 소수 그룹이었던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서 일곱 집사를 세웠다. 소수 그룹을 더욱 배려하고 세움으로써 공동체 내의 갈등의 문제를 해결했고 분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끝까지 차이를 넘어 복음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지켜갔다.

  안디옥 교회도 이런 교회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도행전 11장과 13장에서 소개되는 안디옥 교회는 동질 그룹의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아니었다. 유대인과 헬라인 이라는 매우 이질적인 집단으로 구성된 다인종, 다문화 공동체였다. 특별히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안디옥 교회의 다섯 명의 리더십을 보여준다. 그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명은 아프리카 출신, 한 명은 지중해(유럽) 출신, 한 명은 중동, 또 다른 한 명은 소아시아 출신이었다. 공동체의 다양한 구성을 반영하는 다문화 리더십이었고 이질적인 그룹이었다. 언어,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타문화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높은 이런 안디옥 교회에 사도 바울이 선교사로 파송되어 하나님의 세계 선교를 감당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물론 나는 지금 모든 교회가 다인종, 다언어, 다민족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교회의 예들도 성경에 많이 등장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문화 교회가 뭔가 특수하거나 별종(?)의 것이 아니라 지극히 성경적이고 일반적이며 정상적인 교회라는 것이다. 동시에 한국인이라는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고 단일 언어로만 예배드리는 교회도 얼마든지 문화적, 세대적, 신체적, 사회경제적, 정치적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동질 집단끼리 나누어져 따로 모여 예배할 것이 아니라 차이를 넘어 복음 안에 하나되는 공동체를 세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를 넘어 복음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가 어떻게 지상에서 가능할 수 있었을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요한복음 10:16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이 이 땅에 온 중요한 목적이 우리 안에 있는 양들(유대인들)과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이방인들)이 한 무리가 되는 것이라고 소개하신다. 또 요한복음 17장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신 예수님의 대제사장 적 기도를 보여준다. 그분의 기도의 상당 부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차이를 넘어 복음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을 구하는 간구였다(11, 20~23절).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소원이자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찢으셨다.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종류의 장벽을 허무셨다.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 세대적, 사회경제적, 정치적, 신체적 차이를 넘어 우리를 한 몸, 한 인류, 함께 지어지는 한 건물이 되게 하셨다. (성찬식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께서 하나 되게 하신 그분의 몸을 우리가 다시 찢고 나누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하나 됨을 힘써 지켜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한 아버지를 모시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며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한 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