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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선교와 전도

"자민족(문화) 중심주의와 복음"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9:22) _교회 옥상에서 바베큐 파티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종류의 사람들끼리 서로 왕래하며 사귄다는 뜻이다. 우리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린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보통은 나와 같은 국적, 피부색, 언어, 문화, 세대, 출신 학교나 소속 회사, 사회적 지위와 신분, 종교,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제한적으로 적용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 처한 환경이나 수준, 조건이 다른 아이와는 친구가 되지 말라고 은근히 가르친다. 어릴 때부터 끼리끼리 어울리도록 학습된다. 우리는 자발적으로는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 정치적, 세대적, 사회적, 신체적 차이를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편하며 귀찮은 일이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도 결국 나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된다. 나와 비슷한 연령, 세대, 직업, 고향, 거주지, 교육 및 경제 수준, 사회적 지위, 지지하는 정당이나 스포츠팀, 국적, 언어 등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린다. 심지어는 비슷한 MBTI 유형이나 취미, 운동을 가진 사람들과 교제 관계를 형성한다. 

  그런 사람들의 기호와 편의성 및 사역적 효율성을 반영한 결과, 주님의 몸은 매주 일요일마다 연령별, 국적별, 언어별로, 또는 장애와 비장애로 찢어지고 나눠진 채로 예배드린다. 일 년에 몇 번, 어린이 주일이나 장애인 주일, 외국인 주일과 같은 특별한 이벤트를 제외하고는 다같이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긴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교제하고 어울리는 것, 이것은 죄인인 우리의 본능이며 기본값이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성향을 뒷받침하면서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선교 이론이 있다. 바로 대표적인 교회 성장학자인 도날드 맥가브란이 주장한 동질집단원리(HUP: Homogenous Unit Principle)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인종, 언어, 계급의 장벽을 넘지 않고도 기독교인이 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언어와 문화, 계급과 빈부, 삶의 스타일의 장벽을 넘지 않고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Understanding Church Growth) 이는 매우 설득력 있는 이론이며 선교지에서 검증된 이론이다. 

  다양한 인종, 언어, 문화, 심지어 사회적 계층이 존재했던 인도에서 선교 사역을 했던 그는 이 모든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비효율적인지 경험했다. 실제로 어떤 인도인은 ‘다른 카스트 계급의 사람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다른 종교의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런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심지어는 미친 짓처럼 여겨진다.

  사실 이런 동질집단원리에 따라 사역을 하면 교회 성장이 훨씬 쉬워진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또 다른 불필요한 장벽을 넘을 필요가 없어진다. 나와 외모가 비슷하고, 생각과 문화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 주목을 덜 받고 덜 어색하다. 내가 알아듣는 언어로 찬양을 부르고 설교를 들으면 훨씬 편하고 은혜와 감동은 더 크게 느껴진다. 

  실제로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서도 코로나19 기간 동안 3년 정도 밀집된 공간에 다같이 모일 수 없어서 (매월 첫째 주를 제외하고는) 한국어 예배와 영어 예배를 따로 나누어 드렸는데, 그 기간 동안 계속해서 인원수가 늘어났다. 목회자인 나도 ‘교회 성장’의 유혹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목회자보다 더 복음적인) 성도들의 적극적인 의견으로 다시 매주 세대 통합, 언어 통합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또다시 불편을 느끼고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렇다. 같은 국적, 언어, 문화의 사람들끼리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면 훨씬 편하다. 이것은 분명히 효과적이며 검증된 이론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성경적이며, 복음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님의 몸이 서로 나누어져 따로 예배하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일까? ‘교회 성장’이라는 결과나 효과만 있으면 성경적이지 않아도 되는 걸까? 

  시대 문화나 상황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청사진, 신학적 비전을 붙들어야 한다. 팀 켈러의 말처럼,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나누어서도, 혼동해서도 안 된다. 

  교회 성장은 복음의 결과이지 복음이 아니다. ‘무엇이 통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본질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학적 비전은 무엇인가? (다음 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