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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선교와 전도

"목사님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5개국으로 구성된 “다문화 교회의 다문화 리더십”

  중학생인 딸을 사랑하는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딸을 위해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고 주말에는 특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해서 딸이 원하는 선물도 사주고, 딸에게 필요한 학원과 과외도 시켜주었다. 회사에서 때로는 어려운 일도 겪지만 그때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버텼다. 이제 딸은 대학을 졸업했고 독립하게 되었다. 딸이 아빠와 아무런 상의없이 아빠의 기대와 다른 길을 선택하자, 아빠는 너무나 섭섭했고 딸에게 실망을 표현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니?” 그러자 딸은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가 도대체 절 위해서 해준 게 뭐에요?”

  가상의 이야기지만, 충분히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다. 무엇이 문제인가? 아빠는 아빠의 방식대로 딸을 향한 사랑을 엄청나게 표현했다. 하지만 딸은 그런 사랑을 받고도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못 받았다. 문제의 핵심은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가 아닌 나의 사랑의 언어로, 일방적으로 사랑을 표현한 것이었다. 

  개리 채프먼의 책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에는 우리가 사랑을 소통하고 표현하는 다섯 가지 대표적인 방식을 소개한다.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신체적인 접촉, 그리고 봉사다. 아빠는 자신의 사랑의 언어인 봉사와 선물로 딸을 향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나 딸의 사랑의 언어는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랑을 표현할 때 상대방의 언어를 알고 상대방 위주로 표현해야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이주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우리의 방식으로, 우리의 열심과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사랑을 표현하지만, 이주민들은 그 사랑을 못 느끼거나 오히려 부담과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들은 결혼식이나 생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돈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는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돈을 받는 것을 불편해 하고 비싸지 않더라도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을 때 사랑을 느낀다.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문화의 방식대로 관계를 맺고 이웃을 섬기면 오히려 관계가 멀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할 이주민들의 문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 번째는 개인주의 문화와 집단주의 문화가 있다. 개인주의 문화는 북미, 유럽과 같은 서구권에서 지배적인 문화로, 집단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문화다. 이런 문화에서는 개인의 의견과 인권이 존중되기 쉽고,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덜하며,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권장된다. 반면, 집단주의 문화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중동 등에서 지배적인 문화로, 개인보다 집단이 중시되는 문화이다. 이런 문화에서 개인은 국가나 가족과 같은 집단이 요구하는 가치와 기준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개인이 정체성의 혼란을 덜 겪거나 개인적, 공동체적 위기시 문제 해결이 훨씬 쉬워진다.

  또 다른 문화의 분류로, 죄책결백 문화와 명예수치 문화가 있다. 죄책결백 문화는 앞선 개인주의 문화권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문화이며, 행동의 기준은 법과 규칙, 그리고 개인의 양심에 따른다. 반면, 명예수치 문화는 앞선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문화이며,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나 수치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할 때가 많다. 내가 어떤 바람직한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은 나의 부모님과 가문, 출신 학교나 소속 직장, 지역이나 국가 등을 명예롭게 하는 자랑스러운 구성원이 된다. 반대로 어떤 실수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내 존재가 속한 집단에 수치가 되는 것이다.

   다양한 이주민들의 문화를 이해하면, 그들에게 맞는 문화의 코드로, 그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언어로 복음을 소통할 수 있다. 이것을 복음의 상황화라고 한다. 팀 켈러 목사님은 상황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상황화란 특정 시기와 특정 지역에서 사람들이 삶에 대해 갖는 질문에 대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형태로, 그리고 그들이 힘 있게 느낄 수 있는 호소와 논증을 통해서, 비록 그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심지어 반대할 지라도 성경의 답을 주는 것이다.” 상황화는 우리가 믿는 성경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타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해야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작업이다. 상황화의 대표적인 예로, 사도 바울을 들 수 있다. 고린도전서 9:19-23에는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떻게 모든 사람의 문화의 옷을 입었는지를 소개한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문화적 코드로,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문화적 코드로, 또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의 모습으로 다가선 것은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함이었다. 그렇다면 이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우리도 당연히 이주민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사랑의 언어로 복음을 소통해야 한다.

  감사하게도 내게는 그런 이주민들의 문화를 잘 가르쳐주는 문화 교사들이 참 많이 있다. 가장 가까이서는 우리 제이슨 강도사님이 있고, 5개 국가(필리핀, 인도, 남아공, 미국, 한국)로 구성된 리더들이 있다. 내가 한국 교회 방식으로 어떤 사역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를 하자고 제안할 때마다 누군가는 내게 “목사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달라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라고 알려준다. 그러면 그들에게 맞는 방식으로 투 트랙으로 또는 두 그룹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제 3 문화의 방식, 대안적인 문화의 방식으로 사역을 진행한다. 한국 교회에서 통하는, 내가 경험하고 내게 익숙한 방식이 여기서도 무조건 맞는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른 문화의 방식을 배우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겸손과 관용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런 분들 덕분에 지금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 즉 ‘다문화 감수성’이 많이 개발될 수 있었고, 그런 다문화 리더십으로 인해 우리 교회가 문화적으로 민감한 다문화 공동체로 세워지고 있다. 인종이나 국적, 언어는 다양하게 사용하지만, 리더십이 한국 문화가 지배적이거나 서구 개인주의 문화가 지배적인 국제 교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진정으로 다문화 교회가 되려면 리더십도 다문화가 되어야 하며, 교회 구성원들의 출신 국가나 문화를 리더십이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주민들과 함께 교회를 섬긴지 12년이 지난 요즘에 와서야 가끔 우리 멤버들로부터 이런 칭찬을 듣는다. 얼마 전에는 남아공 출신의 Lucia 자매에게 남아공의 공용어가 아닌 부족어인 Zulu어 표현과 그것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를 설명해준 적이 있다. (나도 우리 멤버들의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려고 나름 노력하는 목사다.) 그러자 Lucia 자매가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한국 사람이 그런 우리 언어와 문화를 이해할 줄 몰랐어요. 목사님 덕분에 잊고 있던 제 고유의 언어와 문화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되었어요.”

  복음의 상황화를 가장 잘 실천하신 분이 있다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맞는 사랑의 언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셨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며 인정하는 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을, 질병과 죽음 가운데 있던 이들에게는 치유와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 나병환자에게는 그저 말씀만으로 병을 고쳐주실 수 있으셨지만, 굳이 신체적 접촉을 하셨고, 봉사를 당연하게 여겼던 제자들에게는 종이 되어 그들의 발을 씻겨주는 봉사를 몸소 보이셨다. 예수님은 진정한 선교사이시며, 다문화 전문가이시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주신 것도 다 각양각색이다. 누구도 예수님을 만난 스토리가 같지 않다. 주님께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또한 이주민들에게 그런 사랑의 수고를 기쁨으로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