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시대 중세를 이끈 사상은 인과론이다. 행동에 따른 철저한 보상을 의미한다. 올바른 삶이 수반이 안될 때에는 다른 성인(聖人)의 공로를 의지해야 한다. 그래서 세례명이 나왔다. 한마디로 세례명은 공로사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우리 죄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씻음을 받았다.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은혜의 보좌 앞에서 마귀들의 참소가 이어진다. “어떻게 저런 인간을 용서할 수 있냐고”
1984년 어간에 영화 “아마데우스”가 나왔다. 주인공인 살리에리는 작곡에 능한 사람이었다. 윤리적으로도 꽤 괜챦은 사람이었다. 그는 구제하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열심이었다. 그런 반면 모차르트는 무질서하고 방탕한 사람처럼 보였다. 살리에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참소한다. “어떻게 저런 인간에게 놀라운 재능을 줄 수 있냐고”
탕자 형님의 외침이 그 영화에서 들린다. “어떻게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삼켜버린 동생을 위하여 신을 신기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 수 있냐고?”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어떻게 저런 죄인들과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가?”라고 외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함성이 들린다.
용서할 수 없어서 몸부림치는 인생은 허탈한 삶을 살아간다. 왜냐하면 용서의 운전대를 타인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하는 거 보고 용서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아마 죽어도 그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프로이드처럼 오늘의 나는 “흘러온 과거의 침전물“로 이해한다. 결코 자신은 피해자이지 가해자라는 인식이 없다. 얼마나 삶이 참 편한가?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인과론의 저주는 여전히 우리 주변을 멤돌고 있다. 은혜를 알지 못하면 배은망덕 할 뿐 아니라 원망과 분노만 가득하여 공동체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자신의 생애도 불행해진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루돌프 사슴코”라는 캐롤을 많이 부른다. 루돌프사슴은 다른 사슴과 달리 매우 반짝이는 코 때문에 놀림을 받았다. 외톨이가 되었다. 가엾은 저 루돌프는 혼자가 되었다. 온리 원(only one)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그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더 이상 나 같은 존재는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거울을 봐도 미소가 나오지 않았다. 세상이 원망스러웠고 다른 사람들도 미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온 세상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달할 산타할아버지가 낭패에 빠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선물을 가득 실은 썰매가 짙은 안개로 인하여 달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온갖 사슴들한테 수소문을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구석에 홀로 외로이 있는 루돌프사슴을 발견했다. 산타는 루돌프 코가 매우 반짝인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루돌프 코가 밝으니 썰매를 끌어주렴” 이 말에 루돌프는 그 부르심 앞에 감격한다. 그 후에 그의 삶은 흥분과 감사로 넘쳐났다.
은혜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부르심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 것인가? 인과론은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오직 은혜만이 살아나게 만든다. 죄에 빠진 인생은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은혜를 만나야 한다. 무조건적인 사랑 앞에 서야 살아난다.
그분이 말씀 하신다.
네가 내 썰매를 끌어주렴, 내 양을 먹이렴
예수님을 만나면 비로소 인생의 방황이 끝이 난다. 비로소 “나는 나”, “I am who I am”“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스토리가 된다. 온리원이 된다. 비교해서 넘버원이 될 이유가 없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내가 나로 살아갈 때에 다른 사람들도 나를 사랑하게 되고 나도 사랑받을 줄 아는 존재가 된다. 노랫말 가사처럼 “그 후론 사슴들이 그를 매우 사랑했네. 루돌프 사슴코는 길이 길이 기억되리”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번 성탄은 다시 루돌프사슴코를 한번 불러보리라
오후교회 최성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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