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유럽의 대부분 국가의 기원은 게르만족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프랑크족이 기원이며, 영국은 앵글로색슨족이 기원이며, 스페인의 기원은 서고트족이다. 오늘은 프랑크왕국을 중심으로 중세 유럽 역사를 살펴보려 하는데, 이는 서유럽의 역사와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근간이 된다.
해가 지지 않던 로마제국의 멸망(476년, 서로마제국)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100년 전쯤 378년에 발생한 게르만 고트족과의 아드리아노플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제국의 승인으로 서고트족은 아드리아노플에 정주했다. 그런데 서고트족을 관리하기 위해 파견된 로마 총독들은 황제의 뜻과 다르게 서고트족을 노예화하고 착취하며 사리사욕을 챙겼다. 그러자 서고트족은 생존을 위해 반란이 일으켰다. 이에 분노한 동로마 황제 발렌스는 서로마의 지원병을 기다리지 않고, 자만심에 충만하여 자신의 병사만으로 서고트족을 선제공격했는데, 기병 중심으로 무장한 서고트족에게 포위되어 하루 만에 정예군인이 4만여 명이 전사하고 동로마 황제 발렌스 자신도 죽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이 전쟁 이후, 로마제국은 군사력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고, 지속되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전쟁은 동로마 지역에서 벌어지고 동로마 황제가 죽었으나, 그 피해는 서로마 지역에 미쳐, 결국 476년 게르만족 출신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 당했다.
서로마제국 멸망(476년)의 멸망 되자, 481년 프랑크족의 족장이 된 클로비스는, 흩어져 있던 족속을 모았다. 클로비스는 서로마제국에서 파견되었던 갈리아 총독(시아그리우스)이 세운 국가를 무찌른 뒤, 드디어 486년 갈리아 지방(현 프랑스/독일지역)에서 프랑크왕국(메로빙거 왕조)을 건국했다.
클로비스는 문자가 없던 나라에 라틴어를 공식 언어로 도입하고 로마제국의 많은 제도를 받아들여 백성을 개화시켰다. 당시 대부분의 게르만족은 삼위일체설을 부정하여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어 쫓겨난 아리우스파 기독교(예수는 피조물이라고 주장)를 믿고 있었는데 프랑크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프랑크왕국의 클로비스는 496년에 삼위일체설을 믿는 정통파 기독교로 개종하여 국가 전체가 정통파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이로써 클로비스는 정통파 로마 카톨릭 교회를 힘입어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클로비스는 511년 죽자 당시 상속법에 따라 4명의 아들에게 나라를 분할 통치하게 했는데, 넷째 아들 클로타르에 의해 558년 다시 통합되었지만, 클로타르 사후 다시 분열되는 등 통합과 분열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중 8세기에 접어들면서 왕위를 계승한 왕들이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왕 밑의 궁재가 실권을 갖게 되었다. 궁재 중에서 카를 마르텔(688-741)은 강력한 힘을 가졌다. 카를 마르텔은 서유럽을 침입해 온 이슬람군을 푸아티에 전투(732년)에서 격파했는데, 이는 교회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시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은 711년 서고트지역(이베리아반도, 스페인&포르투칼) 멸망시켰고, 그 기세를 몰아 이슬람군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경계인 피레네산맥을 넘어, 732년 프랑크왕국 푸아티에를 공격하여 서유럽 대륙을 점령하려 했는데, 이때 카를 마르텔이 이슬람군을 격파하여 이슬람의 유럽 확장에 제동을 건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카를 마르텔 가문은 프랑크족 내 영향력 확대되었고,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는 751년 교황(자카리아)의 승인받아 왕으로 즉위하여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 왕위에 오른 피핀 3세는 게르만족 롬바르드(랑고바르드) 왕국의 위협을 받았던 교황(스테파노 2세)을 도와 롬바르드 왕국을 물리쳤다. 피핀 3세는 이때 점령한 라벤나 지역을 교황에게 바쳤는데, 이것이 교황이 직접 다스리는 영토인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다.
피핀 3세의 뒤를 이어 두 아들 카롤루스(샤를마뉴)와 동생 칼만이 768년부터 공동통치를 하다가 771년 동생 칼만이 죽자 카롤루스가 단독으로 프랑크왕국을 다스렸다. 카롤루스는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대했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카롤루스는 정복지의 주민을 강제로 정통파 기독교를 믿게 했고, 정복지에 선교사를 보내며 기독교 전파에 힘썼다. 한편 카롤루스는 교황(하드리아노 1세)의 요청으로 774년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게르만족 랑고바드르 왕국을 정복한데 이어, 778년에는 이슬람 세력을 유럽에서 축출하기 위해 에스파냐 지역으로 진군했다. 비록 카롤루스는 이슬람을 완전한 축출하지 못했으나, 이슬람으로부터 지금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지역까지 회복하면서 그 옛날 서로마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정복한 이탈리아 중부 땅을 교황에게 교황령으로 바쳤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교황 레오 3세는 800년 12월 25일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카롤루스에게 황제의 관을 선물했다. 이날 교황은 서로마의 부활을 선포했고 카롤루스 대제는 부활한 서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에 등극했다. 이러한 교황의 행동은 프랑크왕국을 내세워 동로마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였다. 한편 카롤루스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분열된 서유럽을 통일하고 문화정책에도 힘을 쏟았다. 이 시기를 ‘카롤루스 르네상스’라고도 불린다.
814년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뒤, 아들 루트비히가 왕이 되었는데, 843년 베르됭조약에 의해 루트비히의 세 아들에 의해 프랑크왕국은 서프랑크(프랑스)와 중프랑크(이탈리아)와 동프랑크(독일)로 분할되었다. 이 조약으로 서유럽의 세 근대국가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모태가 탄생하였고, 870년 메르센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크 왕국은 분할을 마무리했다.
하나님은 당시 천대받던 게르만족을 통해 기독교를 확산시키셨다. 또한 하나님은 프랑크왕국의 왕의 개종과 선교를 통해 서유럽 전체를 복음화하는 역사를 일으켰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해 가심을 교회사를 통해 느끼게 된다.
유럽의 무너지는 기독교와 중동전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개종과 이슬람인의 개종을 통해 유대인과 이슬람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마음이 와 닿는다.
'특집 > 특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슬람은 어떻게 100년 만에 대제국이 되었나? (8) | 2024.11.28 |
---|---|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라”(에스겔 47:8~9, 엡 3:19) (2) | 2024.11.01 |
김지연 약사 “불편한 진실”을 말하다. 반동성애 전사가 말하는 “마약의 심각성” (1) | 2024.10.03 |
“POST 10월 27일을 기대한다” (1) | 2024.10.03 |
"네로 이야기, 그리고 사도바울" (0) | 2024.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