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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특별기고

그럼에도 가까이하기-성육신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상처받기로
기꺼이 결단하신 우리 주님

  요즘은 교회마다 안식년제도가 조금씩 자리를 잡는 것 같다. 일상을 떠나 목양을 생각하는 회복의 시간이면서 재도전을 위한 충전 시간이다. 일상과의 거리 두기를 통해 성장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빌 게이츠는 “Think Week”라 하여 일 년에 두 차례 오두막에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회복과 재충전을 위한 거리두기도 있지만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거리두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과 가끔 토론장에 나와 웃음을 선사하는 한 정치인이 있다. 유시민 작가이다. 작가라기보다는 정치평론가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것 같다. 그가 2013년도에 감동을 주는 책을 한 권 발간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보기 드물게 참 좋은 책을 썼다. 공감하는 내용이 참 많다. 특히 그는 정치를 하면서 좌절, 실패, 통제할 수 없는 감정, 외로움과 같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것들을 다 경험한 것 같다. 

  흥미 있는 것은 그런 아픔과 상처를 받지 않고 극복하기 위해서 한 솔루션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거리 두기”이다. 쉽게 말하면 마찰 면이 많으면 갈등이 잦을 수밖에 없듯이 일정한 간격은 상처를 줄일 수 있다는 이야일 게다. 냉소적인 사람이라고 평가를 들을 수 있지만 그것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이다. 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부분적으로 아니 때로는 많은 부분에 공감이 간다.

  문제는 그 누구도 진공상태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데 있다. 상처 없는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가 상처받았다는 것은 그 누군가, 아니 그 무엇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접근했다가 살벌하게 데인 자국이 아니겠는가? 사랑 때문에 만나고 사랑 때문에 아파한다. 임재범 씨가 불렀던 “사랑보다 깊은 상처”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다가가면 필히 상처받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받는 사람은 상처를 입지 않는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은 늘 아프다. 사랑하는데 다가갈 수 없어서 노래로. 시로, 소설로, 수필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붉은 장미가 모든 속앓이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다면 왜 붉겠는가!

  성탄이 다가왔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역사 안으로 다가오신 것이다. 자발적으로 사랑을 선택하셔서 우리 안에 장막을 치셨다. (요1:14) 스스로 상처 입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라고 한다.

  1984년 5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에 언론사마다 대서특필하였다. 교황은 김포공항에 내려서 땅에 입을 맞추었고 여기저기서 연방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와 너무 대조적이었다. 큰 활자체로 신문마다 “聖下(성하)하셨다”라고 썼다. 성스로운 분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의미이다. 한국에 머물던 사흘 동안 많은 환대를 받고 돌아갔다. 

  성하? 성육신? 답답함이 밀려왔다. 성스러운 분이 땅에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인데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에게 환대받지 못하시면서도 여전히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신 우리 주님이 진정 성하(聖下) 하신 분이시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상처받기로 기꺼이 결단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가까이” 하셨다. 거리 두기를 포기하셨다. “이 작은 맘이 어찌 깊음을 알리요” 어느 시인의 고백이다. 상처로 거리 두기를 설정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우리 예수님이 계시면 좋겠다. 이것이 성탄이다.

  BTS가 울산을 방문한다면 그것은 빅뉴스이다. 그런데 BTS가 나를 만나기 위해서 온다면 빅이벤트(큰 사건)가 되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나에게 곧장 오셨다. 성탄절의 클라이막스는 우주의 한 복판에서 나만 사랑하듯이 달려오시는 하나님의 발걸음이시다. 빅이벤트이다. 큰 사건이다.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시다. (롬4:5) “거리 두기”를 깬 것이다.

  성탄절에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루돌프 사슴코‘라는 캐롤송이 있다. 이쁜 사슴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산타의 썰매를 끌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 화려하고 영광스럽다. 그런데 어느 날 눈이 펑펑 내리고, 도로는 얼어붙었다. 심지어는 안개마저 짙게 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썰매를 끄는 사슴들은 앞을 볼 수 없어 이리저리 부딪히고, 넘어져서 아름다운 선물을 온 세상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심지어 그들이 자랑하던 뿔이 오히려 걸림이 되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때, 저 멀리 한쪽 구석에서 반짝반짝 빛이 보였다. 아름다운 사슴들에게 조롱당했던 빨간 코 루돌프 사슴이었다. 그 코는 어둔 밤에도 환히 보이는 등대와 같았다. 산타는 너무 놀라고 반가워서 빨간 코를 가진 루돌프 사슴에게 말한다.

  “루돌프야~ 빠알간 코 사슴 루돌프야! 이리 와서 내 썰매를 끌어 주렴”

  세상에서의 외로움, 패배, 슬픔, 좌절……. 온갖 멸시로 숨 조차 쉴 수 없었던 그를 가까이 하자. 놀림 받았던 빨간 코 사슴이 살아났다. 썰매를 끌며 아이들에게 이쁜 선물을 전달하는 행복한 전령사가 되었다. 그를 놀렸던 사슴들이 그를 매우 사랑하게 되었다.

  이방의 갈릴리호수에도, 귀신 들려 무덤 사이에 소리치는 곳에도, 죽어 베옷으로 칭칭 감은 무덤 안에도 빨간 코가 있다. 주님이 가까이하실 때마다 죽은자가 살아나고, 갈릴리 어부가 제자가 되고, 열방의 선교사로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났다. “상처가 있음에도, 그럼에도 가까이하기”가 만들어 낸 열매들이다.

  성탄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다가왔다 그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모두 살아날 것이다. (요5:25) 

오! 탄일종이 땡땡땡
저 깊고 깊은 산속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
탄일종이 땡땡땡
멀리멀리 퍼진다
저 바닷가에 사는 어부들에게도
탄일종이 울린다.

 

 오늘 우리 안에 오셨다. 가까이, 너무나도 가까이 계신다. (고전3:16) 할렐루야 아멘!

편집국장 최성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