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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특별기고

추수감사절은 따스한 환대를 베푸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7세기 초,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스코틀랜드와 네덜란드 등으로 피신하여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대거 이주합니다. 오늘날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 지역에 첫발을 내디딘 이주민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혹독한 추위에 떨면서, 102명 중에 절반가량이 사망했을 정도로 큰 고난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 때 아메리칸 인디언 원주민들의 환대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고, 또 그들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년 뒤 이주민들은 감격스러운 첫 수확을 하게 됩니다. 이주민들은 소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 드렸습니다. 그리고 농사에 도움을 준 원주민들을 초대하여 함께 따뜻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따스한 환대와 그 보답으로서의 또 다른 따스한 환대. 그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의 정신입니다.
  저도 추수감사절 하면 생각나는 따스한 기억이 있습니다. 서른 살이 되던 2006년 8월, 저는 울산교회 신학유학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가족들은 나중에 합류하게 되었고, 동기 김 목사님과 함께 미국에 처음 발을 내디뎠습니다. 8월 말부터 시작된 신약학 석사 공부는 매일 밤 읽어내야 하는 수백 페이지 영어 서적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문장들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나의 견해를 영어로 정리하여 다음 날 발표하기 위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읽기 쓰기는 어느 정도 되었지만, 수업 시간에 학생들의 토론을 듣고 끼어들어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수업이 마치면 학교 예배당 구석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듣는 귀를 주시고 말할 입을 주십시오. 귀는 있지만 듣지 못하겠고, 입은 있는데 말하지 못하니 너무 힘이 듭니다.”
  시간은 빨리 흘러 한 학기가 마무리를 앞둔 11월 말이 되었고, 미국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이 다가왔습니다.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는 마음에 추수감사절 기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할 겨를이 없어서, 그냥 먹을 것을 미리 사다 놓고 방에서 지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보다 나이가 열 살쯤은 많아 보이는 40대의 미국인 신학생이 자기 집에서 가질 추수감사 만찬에 저와 김 목사님을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주소를 받고, 추수감사절 몇 시까지 그 집으로 가마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추수감사절 날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이 대부분 집으로 돌아간 추수감사절 날 캠퍼스는 고즈넉했습니다. 저와 김 목사님은 낯선 주소를 검색하여 뽑은 낯선 구글 지도를 들고 클라스메이트의 집을 찾아 출발했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내비게이션이 보편화되지 않았기에, 지도를 보고 길을 연구해서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낮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폭설로 바뀌었습니다. 눈이 덮인 도로, 그것도 처음 가는 도로를 달려서, 처음 가는 집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눈에 가려져 이정표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근처에는 온 것 같은데 정확히 그 집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일단 가까운 집에 들어가서 주소를 보여주며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대문 밖 가로등에 불이 켜져 있고 집안에 불이 켜져 있는 집의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헬로! 우리는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눈도 많이 오고 길도 어둡고 초행길이라 찾기가 어렵네요. 도움을 줄 수 있으십니까?” “들어오세요!” 집주인은 눈을 뒤집어쓴 낯선 두 명의 동양인을 흔쾌히 집안으로 들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따뜻한 사과주스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그러고는 함께 지도를 보며 길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가면 될 것 같은데.”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눈도 많이 오고, 날도 어두워졌는데, 그냥 우리 집에서 추수감사만찬을 같이 나누는 건 어때요?”


  저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그날 처음 보았습니다. 우리는 백인도 아니고 동양인이었습니다. 눈을 뒤집어쓰고 갑작스레 찾아온 ‘이방인’이었습니다.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작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추수감사만찬을 함께 하자고 잠시의 주저도 없이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추수감사절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배웠습니다. 그분들에게 추수감사절은 낯설고 어색하고 다르지만, 어려움에 처해 있고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자를 환대하여 함께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를 초대한 클라스메이트가 소식을 듣고 우리가 도착한 집으로 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래 목적지로 도착하여 그분의 가족들과 초대받은 또 다른 동양인 신학생들과 함께 칠면조 고기를 먹고 으깬 감자를 먹었습니다. 추수감사절에 대한 비디오를 보았고, 함께 퀴즈와 레크레이션을 하면서 그날 밤을 즐겁게 보냈습니다. 
  쉽지 않은 하루였습니다. 낯선 곳, 폭설 가운데에서 길을 찾기 힘들어 온 몸이 지쳤습니다. 타지의 음식도 입에 잘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날 우리의 마음은 그 어느 때 보다 따뜻했습니다. 클라스메이트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환대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가족으로부터 받았던 놀라운 초대 때문입니다. 경계하고 불편해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의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한 이 가정들은 그 감사와 기쁨을 누구에게라도 나눌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주변 사람들에게 차별과 편견 없이 나누는 따스한 환대의 날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누가 살고 있습니까? 타지에서 온 유학생이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 각지에서 온 근로자들이 살고 있진 않습니까? 자녀들 없이 홀로 거하는 노인분들이 계시진 않습니까? 우리 주변에 누구라도 외로움과 궁핍함을 겪고 있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들이 ‘작은 자’일 것입니다. 우리가 바쁘게 살아가던 평소에는 관심을 드리지 못했더라도, 추수감사절을 계기로 주변의 ‘이방인’과 ‘작은 자’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신 14:29)이십니다. 아메리칸 원주민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따스한 환대로 나타냈던 17세기의 이주민 그리스도인들처럼, 외로운 동양인 학생들을 따뜻한 추수감사 식탁으로 초청한 2006년의 미국인 가정들처럼,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교회 안과 밖에 있는 이방인과 작은 자들을 살펴 따스한 환대를 베푸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많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