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세례요한의 고백이다. “어린양이로다”라는 말은 대체로 우둔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묘사할 때에 사용하는 이스라엘의 관용구다.
즉, 한마디로 예수님이 바보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게 말이 되냐?’ 그런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 하신 것 자체가 어리석음의 극치다.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사랑하면 어리석게 된다. 바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바보가 되신 것이다.
그런 예수님은 이땅에서 친구들을 부르실 때 바보들을 모으셨다. 어린아이, 여자, 어부들. 당시에 무시당하던 바보들을 선택하셔서 제자로 삼으셨다. 열두 명이나 되는 천사들을 호령할 수 있는 예수님이 로마의 군병들에게 의해서 십자가 형틀에 메달리셨다.
바보다.
에라스뮈스는《우신예찬(愚神禮讚)》에서 바보가 되신 예수님을 따라 가지 않는 당시 기득권자들을 비판했다. 똑똑한 사람들은 성명서를 내고, 주장하고 논리적으로 따진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한다. 누구든지 깃발을 든자는 똑똑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바보 예수는 그냥 좁은 길을 걸었다, 그런데 지금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이름이 되었다.
종교개혁의 날에 학문적으로 개혁자들은 이론을 발표하고 밥먹고 사라진다. 바보가 그립다. 바보만이 사랑할 수 있고 죽을 수 있다.
이 놀라운 진리를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이 사용했다. “바보 김수환”, “바보 노무현”. <바보가 바보에게>란 서신집도 썼다.
개혁신앙의 자녀들이 이 놀라운 진리를 정치인과 카톨릭에 빼앗긴 채 서성이고 있다. 믿음의 선배 루터는 아버지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벼락에서 겨우 살아난 경험을 하고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한시간마다 고해성사를 했다. 당시 수도원장이 슈타우비치였는데, 루터 때문에 화가 났는지 “죄는 몰아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여기에 소망이 없음을 알고 그는 교황을 만나려고 로마로 올라갔다. 당시 로마는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께서 재판을 받으셨다는 그 계단을 통째로 뜯어와서 라테라노 성당에 비치했다.
세일즈가 시작됬다. 계단 하나 올라설 때 9년의 죄가 속죄되고 주님이 쓰러진 곳에서는 18년 동안의 죄가 속죄받는다고. 그 자리에 루터가 올라섰는데도 해결 할 수 없는 그의 죄성으로 인해 흐느끼며 울었다.
똑똑한 목회자들은 설교 몇 편에 루터와 같은 흐느낌의 고백이 나오는 줄 안다. 성경공부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을 이수하면 좁은 길을 걷는 충성스러운 교인으로 만들어진다고 착각하는 듯하다. 너무 똑똑해서 그런 착각에 빠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루터는 무너진 그곳에서 로마서 1장 17절을 붙든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우둔한 자만이 이 놀라운 단순한 진리를 붙든다. “바보가 바보를 영접하는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똑똑한 녀석들의 합창이 계속되었다. 테젤이라는 사람이 서커스단을 모집해서 면죄부를 판매해서 성당짓고, 교황 빚도 갚아주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거대한 토목공사, 건축에는 비리가 산적하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바보들의 행진에는 똑똑한 사람들에게 가리워진 빛이 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볼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교회 내 직분이 높을수록 천국이 가까이 있으므로 가면을 벗어야 한다. 그런데 직급이 높을수록, 나이가 들수록 놀랍게도 가면이 더 늘어난다. 가면이 오래 되면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린다. 비극이 시작된다.
바보는 너무 바보스러워서 가릴 것이 없다. 예수님의 옷은 벗겨져 제비 뽑혔다. 모든 수치를 드러냈다. 그런 예수님이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다. 그 길을 걷는 것이 종교개혁의 후손들이다. 바보가 되어 묵묵히 영문밖으로 걸어가야 한다.
종교개혁의 달에 우리는 어디를 걷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서”(히13:13)
편집국장 최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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