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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세상사는 이야기

금식, 단식이란 무엇인가?

  예수쟁이로 살다 보면 때로는 금식이나 단식이라는 것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질 때도 있다. 짧게는 한 끼씩 금식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흘, 일주일, 세이레, 많게는 40일 동안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금식을 자처하기도 한다.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뭔가를 도전하고 새로운 결단을 해내야 할 때 자기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를 시험 해보는 것이다.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애매하게(?) 혼나게 되면 밥상머리에서 토라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관심을 얻고자 하는 속내가 있기도 하다. 어떤 부모는 자식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해 별미를 준비하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모른 척하고 내버려 두게 된다. 그럴 때마다 억울한(?) 마음이 들어차기도 하지만 저녁밥을 지을 때면 부엌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에 저절로 코가 벌름거리고 하다못해 밤중에 몰래 나와 부엌 찬장을 뒤지다가 들키기도 한다.
  식욕을 억제한다는 것은 본능을 다스려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 된다. 심지어는 다이어트를 위해서 금식하는 때도 있고, 건강을 위해서 며칠씩 금식원에 들어가 억지로 굶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금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호식이다. 보호식을 잘못해서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몸이 상하면 마음이 상하게 되고 일도 그르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성공적으로 금식을 마쳤다 해도 보호식을 잘못하게 되면 평생 고질을 알게 되기도 한다.
  예수쟁이들에게는 금식이 생소하지는 않다. 모든 종교에서도 마찬가지 일테지만 자기 수행의 과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장기간 금식을 하게 되면 자신의 욕심을 철저히 부서뜨릴 수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도 본능은 죽지 않는다. 잠시 본능을 억제할 수는 있을지 모르니 육체의 본능을 거스를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무모한 도전에 실패를 거듭하는 것이 된다. 상습적(?)으로 금식을 일삼다 보면 거룩한 뜻과는 전혀 관계없는 자기 고집만 키우게 되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왜 단(금)식을 해야 하는가? 조국을 살려내고 백성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인가? 아니면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한 정치 행위인가? 죽음을 기대하면서 하는 것이 금식인데 더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철부지 아이들이 떼를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거창한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조금만 철이 들면 그 속내를 들여다볼 수가 있다. 그럴 때면 웃음이 피식 나기도 한다. 그래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그래서 누구를 유익하게 하는 것인가?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이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여러 번 금식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장기나 바둑을 두는 사람보다도 훈수 드는 사람들이 수를 먼저 읽듯이 들켜버린다는 말이다.
  성경은 금식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옷을 단정히 하고 몸가짐을 가지런히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적한 기도원이나 토굴을 찾아내기도 한다. 오직 절대자와 단판을 해보자는 심사가 뭐라고 하든 새로운 도전에 목숨을 내걸겠다는 강한 믿음의 표현이 된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의 뜻에 절대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주야로 금식하신 것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겠다는 강한 의지다. 연약한 육체의 몸을 십자가에 매달아야 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인격 모독에서 인격살인까지를 훤히 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모세 또한 시내산에서 40주야를 금식하면서 기다린 것은 하나님의 법이었다.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신적 능력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훈련되지 못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에스더는 어떠한가? 민족의 말살이라는 음모 앞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 각오의 결단은 민족을 살리기 위한 간절한 몸부림이었다. 전능자에게 왕의 마음을 바꾸게 하시고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에 자기 한 사람 잘살기를 포기하고 죽음을 향해 내딛는 시작이 된 셈이다. 결국, 유대민족은 역전에 성공하게 된다. 민족을 살리는 한 여인의 결단으로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국회라는 광장에서 세상 언론 앞에 자기의 정치 행위를 버젓이 드러내고 있다. 뜻이 있고 목적이 분명하다고들 하시지만, 최소한 성경적인 방법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렇게라도 하시지 않으면 안 될까 하는 감성이 넘치는 세상인심이라지만 이참에 한 번쯤은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부디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지만, 어딘가 찜찜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또 어떤 귀한 분이 정치생명을 걸고 또 거리에서나 광장에 내 앉으실지 기대가 되기도 한다.
  이참에 시원한 동치미 국물 한 사발 드리고 싶다. 금식 후에는 백성들의 속도 더불어 풀어야 할 것 같아서다.

진영식 목사(소리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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