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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특별기고

"오늘도 본향을 향합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137:1)



  

  나라를 빼앗긴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그리워하며 슬퍼하고 있습니다. 귀향은 모든 생명있는 이들에게는 본능과도 같습니다. 갈 수 없어 아프고, 못가서 서러운 이들. 소위 ‘실향민’들입니다. 명절만 되면 북녘땅을 바라보고 눈물 짓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으니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실향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리워하다 죽어간 이들이 많고, 애타하지만 생사를 확인조차 할 수 없어 포기한 이들도 있습니다. 고향이 그리워 차마 시와 노래로 가슴을 달래던 이들도 있습니다.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해질 무렵)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향수> 中에서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하여 떠나살게 되었는고
이은상의 <가고파> 中에서

 

순례자의 길, 본향을 향하며 거친 십자가를 붙드는 2022년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그토록 시온으로의 회귀를 사모했던 이들이 70년 포로생활을 마감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는 모두들 주저합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약 100만 명이었는데, 돌아온 숫자는 약 5%인 5만 명에 불과한 것만 보아도 귀향에 얼마나 소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레위지파 조차도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여 일부가 돌아오게 됩니다. 지리한 시간과 바벨론에서의 안정된 삶이 그들의 귀향의 걸음을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그리워하나 그것은 상상력에만 머물기를 원했던 것일까요?
  

  고대작품뿐 아니라 근현대사에서도 귀향을 다루는 작품은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켜서 여전히 각 사람들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오딧세이>가 그렇고,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의 걸음을 조명한 탁월한 기독교 작가인 C.S루이스가 쓴 <순례자의 귀향>은 상상속에서만 머물러 있는 “귀향-본향을 사모함”에 대해서 깊은 혜안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책의 결론은 나그네인생, 순례길의 목적은 불합리한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돌아오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두려움이며 불순종이라고 했습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굳게 서서 상상력에만 머물러 있던 귀향을 삶을 통해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소수가 귀향했지만 약속을 붙들고 돌아왔던 이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다시 새롭게 꽃피우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김두완의 ‘본향을 향하네’에 나오는 가사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면 돌아가는 하룻밤 순례자의 길입니다. 거친 십자가 붙들고 오늘도 본향을 향합시다. 아멘.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