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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특별기고

기도하는 젊은 목회자의 뒷모습이 보고싶다

  합판에 제법 덧칠을 한 강대상이 원목으로 대체되었다가 지금은 크리스털이 대세로 자리 잡은 것 같다. 그러니깐 나는 강대상 3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내게 합판에 덧칠한 강대상이 준 은혜로운 터치는 고3 시절로 올라간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헐레벌떡 마지막 버스에 몸을 맡기면 자정 가까이 되어야 집에 도착했던 고3 시절이 있었다. 집 근처에 있었던 교회에 잠깐 기도하고 집으로 가곤 했었는데, 기도하기 위해 교회에 도착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굵은 저음에다가 간절함이 묻어 있는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주여! 아버지여!”


  목사님의 기도 소리였다. 매일 그렇게 나는 고3 시절을 목사님의 기도 소리와 함께 보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도 소리에 묻혀 학창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여전히 어려운 과제는 “기도”이다.


  일전에 섬겼던 교회에서 당회를 하는 중에 기도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일반적으로 월요일 새벽기도는 부교역자들에게 맡기거나 제법 여유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도 예외 없이 월요일은 좀 더 수면을 청하면서 새벽기도를 쉴 때였다. 당회를 하던 중에 장로님 중에 한 분이 갑자기 목청을 돋우면서 “목사님! 성도들도 쎄가 빠지게 주중에 일하고 주일에 봉사하고 월요일 새벽에 기도하고 출발하는데, 목사님도 죽을 각오로 기도하이소!”라고 하셨다.


  목사가 기도 많이 하라고 교육을 받고 있다는 부끄러움, 왜 여러 장로들이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할까 하는 서운함, “당신이나 잘하세요”라고 되받아치고 싶은 무모한 분노.


  순간 스쳐 가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으로 머리가 하얗게 되어 말을 못 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가면서 하나님께서 정돈된 마음을 주셨다. “성령님께서 장로님의 입을 빌어 내게 말씀 하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후에 더 많이, 더 지속적으로, 더 뜨겁게 기도하는 목회자로 자라가게 된 것이다.


  몇 주 전에 한 목사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목양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나누는 중에 그 목사님께서 군 복무 중에 만났던 장군이면서 장로님이신 어느 한분의 말씀을 전해주셨다. “기도하는 젊은 목회자의 뒷모습이 보고싶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주님! 죄송합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다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가 다시 마음을 찢으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교회를 찾아오는 상처입은 영혼들에게 기도의 소리를 선물할 수 있다면 거기서부터 “부흥”은 다시 시작될 수 있으리라.


  모든 것이 진화한다고 좋은 것만 아닌 것 같다. 투명하지 않았던 이전 강대상은 홀로 기도하기에 아주 적합하였던 것 같다. 강단은 설교용도 만을 위해서 제작된 것이 아님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