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미국의 영화와 TV드라마를 대상으로 하는 골든글러브 시상. 올 봄에 영화 ‘미나리’가 골든글러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게다가 극중 할머니로 등장한 윤여정 배우가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게 되어 더욱 이목을 끈 영화다. 그에 못잖게 영화가 너무 밋밋하고 잔잔하다는 관객들의 평이 대부분이어서 큰 대중성을 확보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스릴도 없고 드라마틱하지도 않은 ‘미나리’. 필시 수상受賞한 작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1980년대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민이 한창이었던 그 시절, 한 이민가족의 삶을 그리고 있다. 영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실제적 삶을 보여주는 듯한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2세인 정이삭 감독의 자전영화라고 한다. 그가 ‘미나리’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이민자의 애환, 기독교적 배경과 사상에 기반한 새로운 출발, 아시아인을 바라보는 미국인의 관점, 이민자를 품는 아메리칸의 마음, 코리안 드림이 아닌 아메리칸 드림? 등등 여러 각도로 감상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게 와 닿은 것은 잃어버린 ‘한국인의 정서’였다.
오늘날 우리는 꿈을 찾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무한경쟁과 이기와 전투적 기세로 살아가는 현실을 본다. 이런 치열함이 경제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왔고 세계 속에 위상이 우뚝 선 한국이 됐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잃어버린 한국인의 아름다운 정서는 어디에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떤 처연한 상황 속에서도 강인한 뿌리를 내리며 부드럽고 아름다운 향기로 살아내는 한국인의 정서를 참으로 그리워지게 만든 영화였다.
줄거리야 단조롭다. 한국에서 죽도록 일을 하고 부모를 섬기며 살았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젊은 아빠 제이콥이 미국 아칸소라는 지역에 활착하여 살아보려 나름 애를 쓰지만 쉽지 않다. 화재로 인해 다시 삶을 시작해야 하는, 그 낯선 땅에서 또다시 뿌리 내리려 안간힘을 써야할 이민 가족의 모습을 관객이 상상하게 함으로 끝이 난다.
이민 가족의 단편적이며 소소한 일상으로 보이지만 한국 채소 미나리가 암시하는 것이 크다. 할머니 순자(배우 윤여정)가 미나리에 대한 찬사를 할 때 미나리는 곧 한국인임을(이민자들) 알게 된다. 어디서나 자라는 미나리, 부자든 가난뱅이든 누구든 먹을 수 있는 미나리, 여러 가지 음식에도 들어가서 맛과 향을 내고 약으로도 쓰인다고 알린다. 곧 ‘원더풀 미나리’라고 말한다. 이런 미나리처럼 살아가는 우리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디서든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는 민족, 다양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미나리의 근성으로 뿌리내려가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 미나리의 근성 가운데 또 하나가 향기라고 할까. 한국인만의 정서적 향기를 나는 이 영화 작중 인물들에게서 느꼈다. 그 향기에 취해 울컥울컥 눈물이 북받치길 여러 번이었다.
한국의 어김없는 가부장적 남자, 제이콥. 나이를 막론하고, 삶의 승패와 상관하지 않고 가부장으로서 가족을 책임지려한다. 서툰 삶이지만 가장의 자리를 꿋꿋이 지켜내려는 의지가 물씬하다. 아들 데이빗에게 하는 말, 역경 속에서 한국 사람은 머리를 쓴다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필요한 것은 땅에서 얻어낸다는 자연친화적 말도 그렇다. 의지적이며 자연적인 한국인의 모습이다. 아들 데이빗의 잘못을 근엄하게 호통치는 가부장적 모습 또한 그 시절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내 모니카 역시 전형적인 한국여성으로서의 다소곳함을 지니고 있다. 남편에 대한 불만과 자식에 대한 걱정을 안고 있으면서도 남편의 뜻을 따르려 하고,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어딜 가든 무얼 하든 자식 먼저 생각하는 모성애가 처음부터 끝까지 호들갑스럽지 않고 잔잔하게 그려진다. 한국에서 미국까지 손자들을 돌보러 온 할머니에게서는 다소 개구쟁이 냄새가 나서 한국 노인에 대한 선입견을 깬 듯도 하다. 그럼에도 전형적 한국 할머니임에 틀림없다. 한국 먹거리들을 봉지봉지 챙겨들고 손자의 보약까지 챙겨오는 할머니. 손주들의 생활에 간섭하고 싶고 손주들과 화투장을 두들겨대는 모습에서 옛 할머니의 무지함과 자상함과 사랑이 그 시절 우리 할머니들의 모습 그대로 스며있다. 아빠에게 벌 받는 손자를 애처롭게 여기며 감싸 도는 마음이 영락없는 한국 할머니의 정서를 보여준다.
그리 극적이지도 않고 스릴도 없는 ‘미나리’지만 작품에 대한 의미를 드러난 스토리가 아닌 스토리를 떠받친 극중 인물들의 분위기와 정서에서 더 깊이 찾아볼 수 있다. 어디서든 뿌리 내리고 자라는 연약한 풀줄기 같은 미나리를 통해 가난을 극복하려는 한국인의 근성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하며, 그 근성의 요소 중 하나가 미나리의 특유한 향내처럼 한국인의 정서(진한 가족애를 떠받친 가부장적 사고, 부부간의 멀뚱한 듯하면서도 깊은 사랑, 자신을 던진 모성애, 할머니의 특별한 사랑 등), 오늘날에는 퇴색되어버리거나 잃어버린 우리의 정서가 너무나 그리워지는 영화였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미국영화를 통해서 잃어버린 우리 한국의 정서를 다시 수신 받는 느낌. 어쩌면 우리의 혼란스럽고 황폐해진 정서에 푸른 백신 같은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설성제 수필가
태화교회
울산의 빛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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