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굴라는 본도 출신의 유대인이었다(행 18:2). 본도는 흑해 연안에 위치한 지역으로, 고대부터 상업적으로 번성한 도시국가였다. 본도 왕국은 기원전 1세기 초반까지 독립된 왕국이었으나,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함락되면서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이후 본도는 로마 제국의 주요 거점 도시로 성장하며 많은 이주민이 유입되었고, 그중 유대인들도 상당한 수를 차지하였다.
본도는 지리적으로 서쪽의 비두니아, 남쪽의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 동쪽의 아르메니아 및 파르티아(페르시아)와 접하고 있어, 무역과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본도는 목재, 철과 은 같은 광물, 곡물, 해산물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러한 자원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 무역과 연결되었다.
그림에서 보듯이 본도와 흑해 연안에서 생산된 교역 물품들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거쳐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에게해를 통해 로마로 수송되었다. 이는 본도가 단순한 지방 도시가 아니라, 국제적인 무역도시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러한 교역 물품과 함께 상인들도 로마로 이동 또는 왕래한 것으로 보인다. 본도에서 성장한 아굴라는 천막 제조 기술자였다. 본도가 로마 제국에 속한 상황에서, 아굴라는 기회의 땅 대도시 로마에 가서 큰 사업을 해 보고 싶은 야망을 품었을 것이다. 아굴라는 청년기에 로마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는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을 환영했으며, 천막 제조업과 같은 수공업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로마에 정착할 수 있었다.
한편, 1세기 초 로마에는 약 4만~5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며 강력한 유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 공동체를 기반으로 로마에 정착했고, 아굴라도 이 공동체를 통해 사업을 확장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나 결혼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로마에서 유대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었고, 기술을 가진 장인 계층은 중산층으로 자리 잡으며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AD 49년경,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재위 AD41~54)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로마에 거주하던 많은 유대인이 도시를 떠나야 했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이로 인해 고린도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에서 바울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바울 역시 천막 제조 기술을 가진 자로서 아굴라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상상해 보라. 그들은 먼 외국 땅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 것처럼 기뻤을 것이다. 아굴라와 바울은 함께 생업을 이어가며, 복음 사역에도 힘을 합쳤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교회를 세웠고, 아굴라 부부는 바울과 동역하며 교회 공동체를 섬겼다.
천막(장막)은 당시 사회에서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로마군대에서 군사용 텐트로 사용되었고, 유목민들에게는 거주용 집으로, 상인들은 시장과 장터의 차양막으로 활용했다. 특히 ‘길리기아 천’으로 불리는 염소털 천은 방수 기능이 뛰어나 선박의 돛과 줄로도 사용되었다. ‘길리기아 천’은 당시에 매우 질 좋은 특산품이었다. 바울의 고향은 다소였는데, 다소는 길리기아 지방의 행정수도였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천막 제조 기술을 익혔을 것이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랍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가지 수공업 기술을 배워야 했기에, 바울이 천막 기술을 습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천막 제조업은 어디서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기술이었으며, 바울이 자비량으로 복음 전도사역을 감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아굴라 부부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갈 때, 함께 에베소로 이동했다. 이후 바울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에베소에 남아 에베소교회를 섬겼다. 아굴라 부부는 소아시아 교회들의 어머니와 같은 에베소교회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전 16:19)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아굴라 부부의 집이 교회 모임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굴라 부부의 헌신은 단순히 교회를 위한 공간 제공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에도 능통하여, 에베소에서 아볼로를 만나 아볼로의 신앙을 더욱 깊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했다. 아볼로는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완전하지 않았는데,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를 개인적으로 초청하여 정확한 복음을 가르쳤다. 이후 아볼로는 강력한 복음 전도자로 성장하며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도 바울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클라우디우스 사후(AD54) 추방령이 철회되었기에, 로마가 거주지였던 아굴라 부부도 에베소에서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 바울은 로마서 16:3~5에서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바울)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한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바울이 로마 감옥 투옥 이전에 아굴라 부부가 로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언급으로 볼 때, 아굴라 부부는 목숨을 걸고 헌신했으며, 단순한 지역 교회의 일원이 아니라, 로마와 여러 지역의 이방인 교회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초대 교회에서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한 대표적인 부부였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동역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도 교회를 세우고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아굴라 부부는 재정적으로 부유함으로 바울과 초대 교회를 섬긴 것으로 보이는데, 성경은 아굴라 부부의 재정적 후원보다는 그들의 신앙과 믿음에 방점을 두고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질 만능주의가 만연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 있는 신앙인에 의해 성장 되고 확장되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
아굴라 부부의 헌신은 교회 역사에서 귀감이 되는 사례로 남아있다. 이러한 그들의 사역은 단순한 개인적인 헌신이 아니라, 초대 교회 성장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 의미 있는 역할이었다. 오늘날의 교회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같이 복음 전파에 목숨을 거는 평신도가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서동호 장로(울산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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