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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선교와 전도

“목사님 설교 들으려고 오는게 아니예요”

  울산교회 영어예배부를 담당할 때, 늘 설교에 대한 아쉬움과 어려움을 느꼈다. 나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외국인들의 문화 코드를 이해하고 그분들의 마음에 와닿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한 번은 미국인 Aaron 형제에게 나의 설교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Aaron, 어떻게 하면 영어 설교를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제 영어도 충분하지 않고, 우리 영어 멤버들의 마음에 충분히 와닿게 설교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듣던 Aaron 형제가 이렇게 대답했다. “목사님, 제가 왜 교회를 오는지 아세요? 저는 목사님 설교 들으려고 오는 게 아니에요.” 아니, 내 설교를 들으러 오는 게 아니라고?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교회에 오는 건 교회 가족들 때문이에요. 저는 보고 싶은 형제자매들 만나러 교회에 와요. 명설교들은 인터넷에 넘쳐 나요. 그러나 교회 가족을 만나는 것은 교회에 가야만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순간 한 방 맞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목회 사역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설교이며, 설교를 통해 성도님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설교를 잘하는 사역자가 좋은 사역자로 평가받고 인정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 영어 멤버들의 생각은 달랐다. 교회를 설교를 듣고 무언가를 배우러 가는 학교처럼 생각하기보다는 가족들을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교제하는 모임과 공동체로 여기고 있었다.

이주민 형제 자매들과 가정에서 교제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빌 2:2)

  이렇게 우리 이주민들의 마음과 문화는 한국인들과 달랐다. 모든 사람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어떤 목회자의 설교나 강의가 충분히 좋아야, 그 목회자와 관계를 맺고 싶어지고 심방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주민들(특히 관계를 중시하는 집단주의 문화권의 사람들일수록) 먼저 목회자의 심방을 통해 충분히 우정 관계와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야, 그 목회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지극히 관계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이주민들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일이나 사역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신뢰 관계와 우정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이주민 사역을 위한 성공의 열쇠는 첫째도 관계, 둘째도 관계, 셋째도 관계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야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몸도 움직인다. 관계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는데 일을 하려고 했다가 낭패 본 적도 수도 없이 많다. 관계가 핵심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신뢰할 수 있는 가족이 되어야 한다.

주님이 사랑하신 교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함께하는 여행이 우리가 우리되게 한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은 참 다르다. 한국 교회의 성도님들을 보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정말이지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 같다. 정말로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이다. 해결해야 할 공동의 과제가 있으면 모두가 발 벗고 나선다. 남을 도와주거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에 있어서는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자녀를 위해, 교회를 위해 일할 때는 정말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그러나 할 일이 없을 때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교제하는 것은 정말 참고 견디기가 어렵다. 심할 경우에는 일을 하지 않으면 내가 더 이상 쓸모 없고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질 때도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가치와 중요성을, 우리의 정체성을 ‘일’의 기초에 올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나의 성적과 회사에서의 나의 업무 실적과 성과가 곧 나다.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은 더 능력 있고 더 중요한 사람이며, 할 일이 없거나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은 덜 소중하고 덜 가치 있게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런 율법주의적이고 행위 중심적인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의 문화가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 영향을 끼치고 있고, 성도들도 그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우리에게 편한 옷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관계가 먼저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집에 초대를 받으셨다. 마르다는 주님을 섬기는 일로 너무나 바빴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다. 일을 돕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마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마르다는 예수님께 동생을 책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주님의 응답은 예상과 달랐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눅 10:41~42)

  예수님은 지금 마르다를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손님 맞이를 해야 했고, 마르다는 칭찬받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생 마리아가 비난과 책망받을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편”을 택했다고 인정해 주셨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 시간을 보내고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의미했다. ‘주님과의 관계’(relationship with Jesus)를 ‘주님을 위한 일’(work for Jesus)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가장 좋은 것을 택한 사람이며, 결코 빼앗기지 않는 기쁨을 누린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우리 교회 공동체에는 마르다 같은 사람도 필요하고, 마리아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 그러나 언제나 일보다는 관계가 먼저다. 관계를 뛰어넘고 일로 들어갈 수 없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하는 어떤 일(our work for Jesus)도,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관계(our relationship with Jesus)보다 중요할 수 없다. 관계보다 일이 더 중요한 사람은 때로는 일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주님과의 관계나 타인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관계를 누릴 줄 알고 교제의 기쁨을 경험한 사람은 주님과 타인을 위해 기쁨으로 일하게 된다. 일의 동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나도 일 중심적이고 결과 지향적인 사람이라, 관계나 과정을 가볍게 여길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Aaron을 통해서, 또 우리 영어 멤버들을 통해서 관계의 소중함을, 관계를 맺기 위한 고귀한 시간 낭비의 가치를 배워가고 있다. 나는 우리 한국인들이 이주민들을 통해서 정말 중요한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가치들을 배워가면 좋겠다. 이제 주님을 위해 바쁘게 일하는 것을 잠시 멈춰서서, 주님과 그분이 사랑하신 교회 가족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낭비할 줄 아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