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된 양심으로 여러분에게 너무나도 미안하지만, 나는 여러분이 고난의 자리로 자처해서 나가기를 바랍니다.” – 한 스승이 붉어진 눈시울로 제자들에게 남긴 말
아이가 많으면 가장 자주 가는 곳이 병원이다. 한 아이가 나을 듯하면 두 아이 세 아이가, 그리고 이어서 어른까지 번갈아 가며 또는 동시에 감기를 해대니 계절이 바뀔 때면 모두가 지쳐 있었다. 첫째 은설이가 처음 열이 났을 때의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어찌할 바를 몰라 들쳐업고 응급실에 갔는데 너무나도 별것 아닌 듯 말하는 의사가 그렇게도 야속할 수 없었다. 돌아보면 정말 별것 아니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좀 열이 나고 아파도 그러려니 할 정도로 단련이 되었다.
그런데 유달리 마음이 아팠던 때가 있었다. 처음 겪는 것도 아니고 심각한 것도 아닌, 난지 셋째 은겸이가 한 살이 안 되어 코감기, 목감기로 병원에 갔을 때였다. “이 아이는 아마도 타고난 것 같습니다. 각오하고 조심하세요.” 타고났다는 말은, 나를 닮았다는 말이다. 나와 같은 날에 태어나더니, 이런 것까지 닮았나 하는 생각이 들며 적잖이 속상했다. 어릴 적부터 천식과 비염으로 고생해 온 나로서는 당연한 감정이다. 하지만 내 감정과는 다르게, 마음속에서는 다른 말이 맴돌아서 언제 전할지 모르는 편지를 다음과 같이 썼다.

은겸아.
나는 물론 네가 나와 같은 병을 가지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거야. 하지만 만약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것 또한 감사하게 생각할 거다.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외로운 순간들을, 마음의 준비도 되기 전에 맞아들여야 하겠지만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모두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숨 쉬기가 너에게는 고통이 될지라도, 그것은 너에게 주어진 모든 사소한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될 거다. 한번의 기침조차 온 힘을 그러모아 겨우겨우 뱉어내야만 하는 그런 새벽을 견뎌내고 기진맥진하여 맞이하게 될 그 아침은,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또 새로운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될 것이다.
모두가 잠든 시간, 예고 없이 찾아와 숨통을 조이다가 모두가 깨어날 무렵 흔적 없이 사라지는 불청객을 맞이할 많은 날들은, 너에게 이 땅에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외로이 고통받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따뜻한 심장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과 외로움을 다 이겨낸 후에 돌아보았을 때, 너의 이름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깨닫고, 그 은혜 앞에 겸손해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들아, 아무 염려하지 말고 다가오는 고통과 외로움을 친구로 삼고, 그 모든 것이 축복임을 꼭 마음에 새겨라.
아빠의 양심으로, 너무나도 너무나도 미안하지만 나는 네가 그렇게 단련되고 연단된 후에, 고난의 자리로 자처해서 나가기를 바란다.
p.s. 엄마한테는 아직 이 말 안 했으니 모른 척하고 있어라.
나중에 주워야지 하고도 모른 척 바닥에 남겨둔 쓰레기가, 꼭 배밀이 하는 아이의 입에서 발견되듯 부모의 부끄러운 부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연약함이 어김없이 아이에게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내가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애쓰다가 결국은 부모의 마음도 상하고, 아이도 고생하게 된다.
가장 안타까운 건, 그 과정에서 아이가 자기 존재 자체를 부끄러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가 말하지 않아도 아이는 눈빛과 표정, 분위기를 다 읽는다. 말은 다정하게 하지만 눈빛이 날카로웠던 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답답함이 쌓였던 날_그 모든 감정이 아이에게는 ‘나는 뭔가 잘못된 존재인가?’라는 질문으로 남게 된다.
홈스쿨링을 하다 보면 하루 종일 아이들과 붙어 있으니 더 많은 부분이 보인다. 그러니 눈에 걸리는 문제점들도 더 자주 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들 속에서 자꾸 나의 못난 모습이 비춰진다. 내가 덮어두고 싶었던 성격, 감추고 싶은 습관들이 꼭 내 아이에게서 그대로 드러나 도무지 못 견딜 때가 분명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잠시 멈춰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고 고백하면서, 정작 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사실 아이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채 아이를 바꾸려 애쓰는 것은 사실 자기의 부끄러움을 덮어버리려는 몸부림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에게 ‘부끄러움 없는 부모’를 보여주기 위해 애쓰기보다, ‘부끄러움 속에서도 복음을 붙드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아이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아이를 바꾸려는 노력은 결국 내 부끄러움을 덮으려는 시도일 뿐이다.
하지만 복음은 나를 덮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그 위에 은혜를 입힌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부모라면 먼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도 예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복음 앞에 서는 부모의 태도는 그 자체로 아이에게 가장 강력한 교육이 될 수 있다.
결국 자녀 교육은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 출발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오늘을 감사하며 기뻐할 줄 아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진짜 변화는 아이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인 나에게 설교는, 아들에게 쓴 그 편지와 같다. 설교를 준비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교회의 문제, 성도의 문제, 사회의 문제.... 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 모든 문제는 결국 내 안에 있는 문제들이다. 제대로 살지도 못하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내 부족함 때문에 오히려 말씀의 빛이 가려지는 건 아닐까—그런 두려움 속에서 몇 번이나 멈추고 망설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다시 떠오르는 건, 아들에게 쓴 그 편지다. 아이의 고통 앞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그 밤처럼, 설교의 자리는 결국 연약한 내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자리임을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설교는 언제나 ‘성도를 바꾸려는 말’이 아니라 ‘함께 붙드는 고백’이 된다. 무엇을 가르치려는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를 전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에서 시작된 말이 된다. 그리고 그 고백이 전해질 때, 누군가도 자기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붙들 수 있게 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또한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그 말처럼, 그리고 아직 아들에게 전하지 못한 편지의 마지막 말처럼, 목사의 양심으로 너무나도 미안하지만 복음으로 연단된 성도들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을 향해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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