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계/교계일반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우리의 탐욕이 과정보다 결과를 앞세우게 한다.

  과정을 그다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결과만 좋으면 모두 회장님 소리를 듣는다. 어떤 경로를 통하여 그런 결과물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것 같다. 효과 있는 목양을 위해서 좋은 세미나를 찾다 보면 흥미를 끄는 미끼들이 제법 있다. “급성장하는 교회 성장세미나”, “1년만에 배가하는 성장 원리” 등등 교회성장에만 이런 현수막이 붙는 것이 아니다. 빠른 속도로 재산을 증식시켜 준다는 세미나, 특강들도 즐비하고 더 나아가 이런 주제들은 서점가에도 흔하게 보인다. 유튜버 쇼츠에 돌아다니는 흥미 있는 주제가 넘침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투자 미끼 사기이다. 1억을 투자하면 한 달에 30%의 수익을 올릴 수 있고, 석 달이면 원금 회복이 가능하고 그 후로는 평생 수익률을 받을 수 있다고 유혹한다. 특히 다른 사람을 소개하면 원금 회복 속도가 더 빨라진다고 한다. 뉴스를 통해 이런 사기꾼의 꼬임에 빠져서 손해를 본 사람들이 경찰청 앞에서 피켓을 들고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곧잘 본다. 탐욕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빼앗은 놀라운 작품이다. 힘겨운 과정 없이 엄청난 수익의 결과에 이를 수 있다는 교훈을 무시한 탓이다. 어디 이런 양상이 투자 미끼 사기에만 나타나겠는가?

사회는 학습효과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해 간다.

  사회는 학습효과를 통하여 진보해 간다. 이전 정부의 성과와 잘못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 현 정부의 과제이다. 힘겨운 학습을 통하여 만들어진 현재를 또 다른 미래로 넘겨줘야 한다. 그러므로 어찌 과정 없이 현재를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전 역사를 지우거나 왜곡하는 것 만큼 뻔뻔스러움이 없고 천박한 인식은 없다.

마치 죽음에 이르지 않고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과 진배없다. 

  가끔 청년들이 좋은 책을 소개해 달라고 한다. 당연히 가슴이 뜨거워지는 책을 주로 소개해 준다. 그런데, 후일에 물어보면 책을 읽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구입조차 하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왜 물어보았을까? 그래서 요즘은 책 소개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사실 책은 자기가 닥치는 대로 읽다 보면 좋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분하는 능력이 생긴다. 인수분해 없이 곧바로 함수나 미적분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과 같다. 거추장스러운 작업을 생략하고 싶겠지만 사실 그렇게 되지도 않을뿐더러 그렇다 하더라도 열매는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다. 고전의 함정은 요약본에 있다. 고전이 주는 향기에 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요약본을 읽고 긴 시간을 할애하여 독서하지 않은 데서 나오는 결과물이다.

10년간의 우여곡절을 그린 오디세이가 더 강력하게 유럽의 정신을 견인한다.

  유럽의 아름다운 정신문화를 이끌었던 서사시 중에 호머의 두 작품이 있다. 하나는 일리아드이고 또 하나는 오디세이이다. 잘 알다시피 일리아드는 트로이 목마를 이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리스와 트로이제국과의 10년 전쟁 중에 거의 마지막 1년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유럽의 정신을 이끄는 문화는 오디세이가 훨씬 더 강력하다. 오디세이는 전쟁에서 이긴 장군이 자기 고향 이타카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귀향의 여정이 거의 10년이다. 이 동안에 난파, 야만인의 공격 등 숱한 어려움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귀향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귀향이 아름다운 것이다. 

과정 없는 인생, 죽음 없는 부활은 가짜

  오디세이가 서양문명에 던진 메시지는 “과정이 없는 인생은 가짜”라는 것이다. “죽음이 없는 부활”은 엉터리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과정이 스토리다. 죽음에 이른 과정이 부활의 정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믿음의 선배 “바울의 오디세이”가 있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11:23~27)

 선교여행 10년을 통하여 바울의 몸에 남겨진 그리스도의 흔적이다. 죽음이다. 스티그마다. 그래서 그에게 부활은 영광스럽다.

교회의 영광은 죽음을 통과한 부활 안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

  호주를 여행하다 보면 블루마운틴을 가게 된다. 그곳은 마운틴이지만 아래로 움푹 파인 곳을 한참을 따라 하산해야 한다. 마운틴인데 하산을 하다니... 그러다가 집에 돌아갈려면 이제 서서히 힘겹게 올라와야 한다.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헬리콥터나 케이블카로 가서 세 자매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 찍고 돌아온 사람이 아프고 지친 여정을 통하여 경험한 그 장엄한 영광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비단 호주뿐만이 아니다 통영에 가면 미륵산이 있다. 걸어서 올라가도 40분밖에 안 걸린다. 그 거리를 케이블카로 올라가다니…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등반이 힘드신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과정을 누락시키면 정상에서 야호~~~라고 외치기가 민망하다. 

  과정이 생략된 부활은 영광을 누릴 수가 없다. 교회가 천박한 역사를 가졌던 시대는 모두가 죽음에 이르지 않고 부활을 누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것은 그가 죽음에 이르러 부활의 영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교회의 영광은 죽음을 통과한 부활안에서 해석되어질 때에 가능한 것이다. 부디!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 승리하는 주님의 용사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