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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특별기고

[3.1절특집] 그 어머니와 그 아들들!

조마리아 여사(왼쪽)와 안중근 의사(오른쪽)


자식 넷을 모두 나라에 바친 어머니! 조마리아, 그녀는 독립운동가로서.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용 되었던 여운택, 신천수 할아버지가 그 한을 풀지 못해 1997년도에 와서야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일본제철을 상대로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했다. 20여 년간 법정공방을 거치다 작년에 일본은 반도체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와 백색국가제외조치라는 보복행위를 내세웠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한창 일어났다. “NO JAPAN”포스터와 손가락이 잘린 안중근 의사의 검은 손도장 옆에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라는 문구가 적잖이 돌았다. 일제강점기 백 년이 흐른 지금에도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의 가슴 저린 울분이 여전한 모습이다. 제대로 된 사과 한번 받아보지 못한 것이 우리 국민의 한이랄까, 일본이 독도문제도 위안부문제도 아무렇지 않게 다루는 모습이 마치 이런 우리의 한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라의 주권이 넘어간 1905년 을사늑약 때로 거슬러 오르면 이미 일제강점 하 피폐한 삶을 견디지 못해 만주 땅으로 러시아로 떠나간 우리 백성들이 있다. 안중근 의사는 그 무렵부터 독립운동을 해오다 한일병합조약이 이루어진 그해 1910년 3월에 중국 대련 뤼순감옥에서 사형되고 만다. 안중근 의사가 했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란 없다!”라는 말이 절절해진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안태훈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안중근(1879-1910), 안성녀(1881-1954), 안정근(1884-1949), 안공근(1889-1939)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들이다.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을 식민지화 시킨 원조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처단했다. 안정근은 북만주 땅에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운영하며 이봉창과 윤봉길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던 사람이다. 안성녀는 안중근 의거 이후에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의 군복 만드는 일을 했다. 조마리아 여사는 자식 넷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친, 어머니 중에 어머니, 나라의 어머니였다. 
  

  1907년에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넘어갈 것이라며 2천만 동포가 참여한 운동이다. 안중근은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고 지부장이 되었고, 평양 명륜당에서 국채보상운동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또 가족의 패물을 모두 국채보상을 위한 의연금으로 내게 했다. 이에 동생 정근과 공근이 형의 뜻을 받들어 삼흥학교 교원 및 학생들과 함께 34원을 국채보상 의연금으로 납부하였다.
  

  어머니 조마리아의 동참 또한 적극적이었다.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의 의연활동에서 은장도, 은가락지, 은귀걸이 등 20원 상당의 은제품을 납부한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 이전부터 국권 회복을 위해 애썼음을 알게 된다.
  

  1907년 7월에 안중근 의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나고자 돈의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고 어머니 조마리아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이때 어머니 조마리아는 “집안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고 말했다. 어머니 조마리아의 애국심이 안중근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조마리아는 변호사에게 아들의 변호를 요청했다. 이때 평양 헌병대와 경찰서는 오히려 조마리아를 추궁하였으나 조마리아는 너무나 태연하게 아들이 러일전쟁 때 주야로 나라를 근심하였고, 국채보상운동 때에는 온 집안사람들에게 국채보상 의연금을 내게 했으며, 평소 모든 면에서 애국자라고 변호하며 일제의 추궁에 반박하였다.
  

  안중근 의거 혐의로 동생들은 더욱 지독한 탄압을 받았다. 1909년에 정근과 공근이 일제에 체포되어 한 달 넘도록 옥고를 치렀다. 이들이 뤼순에 있는 안중근을 면회하기 위해 인천에 도착했을 때 일제는 이들을 수일 동안 구류하고 구타하였다.
  

  1910년 2월 14일 일제가 안중근 사형을 선고했을 때 조마리아는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본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이다”며 일제의 재판을 크게 질타하였다. 조마리아는 죽음을 앞둔 안중근을 면회하는 대신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아들들 편에 편지를 보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그 아들에 그 어머니? 그 어머니에 그 아들! 나라를 위해 자식을 바친 조마리아 그녀, 슬하 자식 넷과 함께 아낌없이 독립운동을 했던 진정한 독립투사인 그녀의 정신을 어떻게 우리가 이 땅 가운데 면면히 이어받을 수 있을까 싶다. 
  

  조마리아는 이후 경제적으로 궁핍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고난을 겪는 임시정부 후원활동을 적극 추진했다. 1927년 상해에서는 거주동포 208명이 삼일당(三一堂)에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헌장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출하였다. 조마리아는 임시정부 경제 후원회 위원이 되어 어려운 임시정부의 경제적 힘이 되어주는데 적극적이었다. 
  

  생전 ‘여중군자(女中君子)’, ‘여걸(女傑)’이라 평을 들었던 조마리아는 1927년 7월 15일 상해에서 향년 66세로 별세하였다. 2008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풀들이 일어나는 3월이다. 어김없이 돌아보게 되는 역사 속에 독립운동가들의 피 맺힌 절규는 언제쯤 우리 가슴에서 평안과 자유의 노래로 환치될 수 있을까. 


설성제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