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문화/이서원 시인의 <詩視한 이야기>

“새벽을 건너가는 교교한 달빛 한 자락”

울산의 빛 2025. 5. 1. 16:10

  시인은 시선과 감성의 모든 것에서 일상의 미세한 움직임도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의 촉수를 곧추세우며 사는 운명의 주체다. 관조 되는 모든 것을 포용하여 두루 통섭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없다면 그만 펜을 놓아야 한다. 아무리 논리가 정확하다 해도, 시는 그 너머의 사유를 담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잠을 자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어떤 일상의 부딪힘 속에서도 문득 번개처럼 스쳐 가는 언어의 포착은 쾌락을 선사한다. 문학의 서사는 항상 마음의 준비성에서부터 찾아오는 숭고한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어떤 것을 갖다 놓아도 신선한 비유만이 살아남을 뿐이다. 오로지 일회성의 시, 단 한 번만 존재하는 시의 발산은 그래서 더 정제된 마음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런 시는 휴지가 되고 만다. 하여 참으로 시인의 길은 처절한 몸부림이며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시적인 것’이 따로 어디 존재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창조이래 모든 것은 시의 소재이면서 대상이다. 숱한 것을 생선 뼈 발라내듯이 샅샅이 도려내는 일이야말로 시인의 본령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사랑방에서 혼자 잠을 자다가 교회 종소리가 뎅! 뎅! 뎅! 울리면 혼자 부스스 일어나 치동댁 밭둑을 따라 좁은 길을 걸어 교회로 갔다. 알싸한 찬바람이 볼을 스치면 그 상쾌한 기분이라니! 무서움도 모른 채 한참을 걷다 보면 저 희부연 종탑 옆으로 비스듬히 새벽달이 걸려 있곤 했다. 상현의 가녀린 달은 애잔하고 무엔지 슬펐던 그림이다. 깊은 믿음의 근원은 알 수 없었지만, 저 달빛이 주는 고요하고 아름다움은 끝내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마음에 품었던 간절한 기원, ‘서시’와도 같은 알 듯 모를 듯 그저 마음에 잔잔히 파동을 울릴 시를 쓰는 길을 숙명으로 받들겠다고 두 손을 잡았다. 돌아보니 꼭 40년, 어느덧 이만큼 멀리 와 있다. 돌아갈 수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후회한 적도 없다. 

  어둠의 한 자락 끝에서 달은 소의 혀처럼 이 지구를 사랑으로 핥는다. 송아지가 태어나면 축축한 온몸을 닦아주는 건 어미 소의 온유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이 시간, 곧 다가올 여명의 하루를 보듬는 행위의 품성이 곱다. 자애다. 소의 등짝 같은 지구의 귀퉁이를 넉넉하게 품으며 여릿한 아침을 맞는다.

  통성의 기도가 잦아들고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간절한 기도를 드릴 때, 삐거덕거리는 의자를 조심스럽게 밀치며 집으로 돌아간다. 영롱한 풀잎, 반짝이는 수만 송이의 이슬을 내 바짓가랑이 끝자락에 묻히며 타박타박 왔던 길을 돌아간다. 존재란 어쩌면 가늘게 휘어진 풀꽃과는 같은 것일까. 지적인 영성을 건너 바람결에 흩어지는 시간 앞에서 늘 자아는 휘청거린다. 

  어느새 까치는 회화나무에 앉아 연두 잎 같은 소리를 내지르고, 어느 집에선 쇠죽 끓이는 연기가 굴뚝으로 피어오른다. 모든 것이 화평한 동리, 달은 어느새 제 모습을 숨기고 사라졌다, 종탑 끝 종소리의 긴 여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