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하고 친구생일에 꼬마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코로나19시대에 맞이하는 추수감사'라는 주제를 받고 맨 먼저 스쳤던 생각입니다. 모든 것을 일단 코로나19를 가지고 시작하는 우리 시대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B.C.와 A.D.로 시대를 나누었습니다. 세계역사는 ‘주님 오시기 전’이라는 ‘Before Christ’라는 영어의 약자와 주님이 다스리시는 해, Ano Domini라는 라틴어 약자로 구분해왔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는 B.C.와 A.D.라는 약자를 흉내낸 B.C.와 A.C.로, 즉 Before Corona와 After Corona로 나누려고 듭니다.
게다가 ‘추수감사’라는 단어야말로 현대인의 귀에는 차라리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라고 조소하는 노래처럼 들리는 것은 오늘 세상은 농사를 짓지 않는 시대이기에 ‘추수’라는 단어조차 점점 경험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곡식을 거두는 일은 땅을 준비해서 씨를 뿌리고, 적절한 시기에 비가 내리고, 태양이 내리비치고, 캄캄한 땅 속에서 곡식 알갱이가 움을 티우고, 머리를 내밀어 바깥 세상에 자라는 데는, 마치 태어난 아기를 쓰다듬듯이 간간히 부드러운 바람도 불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가뭄이라도 들면 농부들은 더욱 간절히 하늘을 바라보고 급기야는 기우제(祈雨祭)조차 드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타들어가던 대지에 비만 내려준다면 금식(禁食)인들 자해(自害)인들 못하랴는 것이 농부의 마음입니다.
늦게나마 내려준 빗방울 덕분에 곡식이 자라서, 들판이 황금빛으로 무르익어 가면, 물론 오늘 우리의 눈에도 여전히 아름다워 보이지만, 옛날 땀 흘려 농사짓던 사람들이 바라보고 느끼는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수긍할 것입니다. 마침내 가을은 깊어지고 들판은 휑하니 비어가지만 추수한 낱알이 곡간을 채울 때 누가 일러주지 아니해도 사람 사람마다 감사의 마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추수감사>라는 절기는 모든 민족 누구에게나 자리했습니다만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는 오늘 우리의 마음에 추수감사를 떠올리는 것은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라는 노랫소리를 귓전에 소환해 내는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대부분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사는 세상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먹거리는 누군가가 땅에서 가꾸어 시장에 나온 것으로 먹고 살고 있습니다. 하긴 닷새에 한 번씩 열리던 ‘시장’조차도 점점 멀어지는 시대입니다. 간밤에 휴대폰으로 주문한 싱싱한 먹거리가 이른 아침에 배달되는 시대이고, 아니 어쩌면 그것도 귀찮아서 아예 조리된 음식을 배달 받아서 필요하면 잠간동안 에어프라이에 돌리면 따끈따끈한 음식이 식탁에 나오는 시대입니다. 농경사회가 아니기에 추수라는 것을 모르고, 땀 흘려 농사를 짓지 아니했으니 풍성한 소출을 보아도 꼭 같은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들판이 황금빛으로 무르익고 오곡백과가 탐스럽게 익어가며 산천이 울긋불긋한 아름다운 가을에 우리의 한 해의 삶을 돌아보며 감사의 기억을 강제 소환하는 것은 무익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먹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식탁마다 감사하지 않아도 한 해에 한 차례는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에 어쩌면 대부분의 교인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추수를 하지 않지만 교회는 어김없이 가을이 오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가 봅니다. 비록 추수의 감격이 멀어졌지만 그래도 한 해 동안 우리의 식탁에는 먹거리가 있었을 뿐 아니라 생각해 보면 ‘감사’할 일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 잠자리에서 오늘도 일어났습니까? 그렇다면 살아난 것을 감사하십시오. 거기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면 삶은 끝났기 때문입니다. 잘 잤다는 것은, 주님의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새날을 맞이할 때마다 “주의 사랑과 자비가 아침마다 새롭고 주의 진실과 참되심이 크도다.”(애 3:23)고 되새겨 주어야 합니다.
눈을 떠보니 옆에 배우자가 새근새근 자든지, 아니면 이미 거실로 나가서 하루를,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살아있는 자들 가운데서도 엄청 복 받은 자들입니다. 눈을 떠서 배우자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날 주신 최상의 선물입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우리에게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뒤에 남는 사람이 상실감을, 그 아픔을 겪게 되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하나님이 주신 그 귀한 선물을 함께 누릴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이미 그런 외로움과 슬픔과 고통을 겪는 분도 있지만 그러기에 더욱 부부가 함께 함은 최상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사람이요 신앙인입니다.
마주 앉아서 아침 식사를 하셨습니까? 아침식탁에서 과일을, 식전에 먹는 것이 좋은지, 식후에도 괜찮은지, 요즘 우린 배부른 고민을 하지만, 그럴 때는 역시 앞 세대 어른이신 어머니가 들려주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별나게) 하지 않아도 나는 80넘게 살았다!” 네, 그분은 귀한 진리를 자녀손에게 전수하고, 5년 전, 95세에 주님께로 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허락하신 날까지만 살기를 원한다면, 지나친 건강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아침을 먹은 후에 커피를 내려서 마시면서 생각해보면, 온 세상에 좋다는 커피를, 식탁에서 마시고 산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케냐, 이디오피아, 인도네시아, 자마이카,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브라질, 콜롬비아, 과테말라, 우간다 등 한참 열거해도 빠진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반만년 역사에 이런 때가 있었습니까?
남의 집을 방문해서 커피나 차를 대접을 받았다면 내온 잔이 식기 전에 일어나지 말라는 어느 나라 풍습을 살짝 바꾸어, 잔이 아직 따뜻할 때, 입안에서 커피향이 감돌고 있을 때, 누군가를 기억하고 기도하며 축복하는 새로운 전통을 이 가을에 만들면 어떨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유튜버를 통해 찬송을 불러내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손에 있는 휴대폰도 충분합니다. 같은 찬송이지만 영어로 내용을 음미하면 맛이 더 살아나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살아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And the life is worth living, just because He lives)”란 구절이 제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찬송가 171장, 하나님의 독생자(살아계신 주)를 수없이 불러도 알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수년씩 배운 영어를 사장(死藏)시켜 놓지 마시고 한 땀씩 배워보면 어떨까요?
이 아름다운 감사의 계절에, 온갖 나쁜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생각을 이제부터 묵상해 보십시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코로나를 계속 묵상하면 우울하고 불안하고 비참해 질 수 있지만, 주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며 하루를 주님께 의탁하면, 일마다 때마다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라는 주제나 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하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의 식탁은 감사가 항상 넘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B.C.와 A.C.를 사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B.C.와 A.D.로 보는 자입니다. 세상 뉴스는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만, 여전히 주님이 다스리시고, 우리 생애 가장 영광스런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묵상하며, 가슴 뛰는 감사의 절기를 갖기를 바랍니다.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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