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등살에 못이겨 겨우 교회에 나온 중년 남성이 긴 설교 시간에 직면했다. 아예 처음부터 듣지 않으려는 듯 팔짱을 낀 채 눈을 깔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가 서너 문장을 넘어갈 때 이 남성이 고개를 들더니 팔을 내리고 몸을 더 앞쪽으로 숙이고 고쳐 앉는다.
이처럼 설교를 시작할 때 처음 2~3분이 매우 중요하다. ‘관심 없는 자를 관심 있는 자’로 바꿀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전략적 관점에서 본다면 “협상과 제안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왜 중년 남성이 경계를 풀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경청하겠는가? 본인 이야기가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고전10:23)”라고 하셨다. 옳은 것이지만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정답을 뛰어넘은 덕이야말로 각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공감력이다. 공감력을 가졌다는 의미는 상대방의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협상과 제안” 기술이 이전보다 훨씬 더 요구되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근래에 미국의 관세전쟁을 보면 트럼프와 협상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협상 전문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공감력이다. 공감력은 단순히 “너를 이해해”라는 감성적인 작업이 아니라 “내면의 니즈”를 찾아내는 것이다.
내면의 니즈를 찾아내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 ‘관찰’이다. 얼마 전 모 도시에서 멍때리는 대회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무념의 표정으로 앉아 있는 자를 찾아 상을 주는 대회이다.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이런 대회를 통해서라도 잠시 쉼을 주고자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협상을 위한 니즈를 파악하기 위한 관찰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함께 하는 것”이다. 그만큼 니즈 파악은 시간이 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봐야 진정한 필요를 알게 된다.
왜 설교가 일종의 협상과 제안 기술이라고 하는가?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하는 것은 참고서를 통하여 학습하면 된다. 그러나 그 해석(주석)을 바탕으로 청중들에게 적용하면서 선포하는 것은 시대적 상황에 대한 청중들의 내면을 간파해야만 가능하다.
이런 협상의 전문가는 예수님이시다.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인 마태복음에 유독 구약성경 인용이 많다. 예수님도 상당 부분 인용하셨다. ‘그때의 말씀을 이때 적용’하여 리뉴얼 하신 것이다. 그것은 “말씀과 청중” 모든 영역에 탁월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모든 설교자의 모본이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대상은 협상 대상이다. 동물과 모든 만물도 마찬가지다. 협상을 단순한 전략으로 이해하게 되면 그 대상을 착취하고, 지배해서 자기 것으로 속도감 있게 만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모든 만물 앞에 서면 결국 균형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하물며 설교는 하나님의 형상이 또렷이 담겨 있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받은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앞에 있는 청중을 하나님의 가슴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설교가 설교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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